임금 체불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가운데, 근로자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투신 소동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영화 <베테랑>의 스틸컷.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에 위치한 세왕병원. 폐업한 병원 건물은 법원경매에 넘어간 지 오래다. 건물 내부를 살피면 쓰다 만 집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세왕병원 사업주는 이 아무개 씨(63). 이 씨는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체불사업주 명단에 포함돼 있다.
이 씨는 왕십리 세왕병원을 포함한 두 곳의 사업장에서 4억 6100만여 원의 임금을 체불했다. 세왕병원 행정직 직원이었던 김 아무개 씨는 “당시 회사의 임금체불이 심해지면서 간호사들과 함께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2013년 퇴사 당시 김 씨가 받은 월급은 10만여 원에 불과했다.
회사를 나온 세왕병원 직원들은 근로복지공단에 체당금을 신청했다. 체당금은 국가가 기업이 도산했을 경우 사업주 대신 퇴직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지출된 임금은 정부가 사업주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해 메운다. 김 씨는 “체당금을 받기 위해 첨부할 서류가 많아 애를 먹었다”며 “병원장 사인도 받고 해서 1년 정도 기다리다가 밀린 월급을 국민 세금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세왕병원 노동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 경북대병원 주차관리 노동자들은 아직도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경북대병원 주차관리 하청업체 새롬에스티 소속 노동자 29명은 지난해 10월 22일 밤 10시께 임금을 체불한 사업주 자택에 찾아갔다가 주거침입 등 혐의로 경찰에 끌려나왔다. 당시 새롬에스티 사장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며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 2일 강성봉 민주노총 대구·경북본부 조직국장은 “새롬에스티 사장이 주차관리 노동자 임금 약 9000만 원과 퇴직금 약 2억 4000만 원을 체불하고도 이를 지급하지 않아 찾아간 것”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일 새롬 노동자들은 사장을 만나 퇴직금 지급을 요구했으나 사장은 차를 타고 현장에서 빠져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 의료연대 관계자는 지난 2일 “새롬 사장이 근로기준법 위반(임금체불) 등 혐의로 지난해 말 구속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밀린 퇴직금 지급은 여전히 이행되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원청업체(경북대병원)의 대량 해고 문제 역시 해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해 추석 연휴 무렵 하청업체가 바뀌면서 해고된 이들은 이번 설까지 ‘차가운 거리’에 남았다.
경북대병원 주차관리를 했던 한 노동자는 연휴 전 인터뷰에서 “고용노동부에 처리를 요구해도 법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복직이든 임금이든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단 몇 퍼센트의 희망이라도 보였으면 좋겠다”며 “명절 전까지 체당금을 달라고 했는데 지급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회사와) 싸우는 사람들은 다른 데 신경 쓸 형편이 아니고, 싸우지 않는 사람들 역시 구직을 못해 금전적으로 힘들다”고 전했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밀려드는 임금체불 신고와 상담 전화로 북새통이다. 센터 관계자는 지난 1일 “(임금체불과 관련해) 문의가 많이 들어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27일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임금체불을 경험한 근로자는 29만 5677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통계가 잡힌 최근 6년간 가장 높은 수치다.
또 지난해 체불 신고 총액은 1조 2993억 원으로 2011~2015년 동안 두 번째로 많았다. 반면 체당금 지급 규모는 2009년 3000억 원을 초과한 뒤 2010년 이후 2000억 원대 초중반을 유지하고 있다. 즉 늘어나는 체불 신고와 비교해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인 구제 조치는 경직돼 있는 셈이다.
지난해 1월 시민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전국 체불 사업장 수는 11만 9760곳으로 파악됐다. 이들 사업주는 대부분 외부와의 연락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얼마 전 관급공사에 참여했다가 임금을 체불한 것으로 전해진 H 업체 대표는 지난 2일까지 <일요신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난 2013년부터 정부는 체불 총액 3000만 원 이상, 임금체불 2회 이상으로 유죄가 확정된 사업주에 대해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 1일 기준 고용노동부는 임금체불 사업주 738명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이 가운데 2015년 들어 체불액이 가장 많은 회사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아웃소싱 업체 코스모리치다. 이 회사 대표 이 아무개 씨는 지난 2012년 고용창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 단체로부터 ‘공로대상’을 받기도 했다.
체불 사업장인 세왕병원(왼쪽)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코스모리치 사무실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이 씨는 12억 7000만여 원의 임금을 체불한 뒤 자취를 감췄다. 코스모리치 회사 대표번호는 유명 패스트푸드 점포 번호로 바뀌었다. 해당 점포 직원은 “요즘도 코스모리치를 찾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고 전했다. 지난 2일 회사 사무실을 찾았지만 이 씨를 만날 수 없었다. 해당 사무실은 한 투자회사가 임차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무실 관계자는 “코스모리치를 모른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임금체불 사업주에게 꽤나 관대한 편이다. 지난해 경찰이 발간한 ‘2014 경찰 통계 연보’를 보면 경찰이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입건한 횟수는 21회에 그쳤다. 이 중 검거는 14건에 불과했다. 발생대비 검거건수 비율은 66.7%를 기록해 다른 노동범죄 발생대비 검거건수 비율(96.2~100%)보다 현저히 낮았다. 강화연 은평노동인권센터 대표는 “(관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임금체불 사건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평노동인권센터 측이 밝힌 임금체불 실태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먼저 50대 여성 A 씨는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식당에서 최근까지 일했다. 당시 A 씨는 업주로부터 ‘일을 못 한다’는 등의 이유로 뺨을 맞았다. 평소 업주의 욕설에 힘들어하던 A 씨는 뺨을 맞자 “식당일을 그만두겠다”며 남은 임금을 지급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업주는 “우리가 주말에 손님이 많으니까 이번 주 주말까지는 와서 고기 굽는 걸 도우라”고 했다. A 씨는 “정 필요하면 연락 달라. 그러면 돕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연락은 없었고 연락을 받지 않은 A 씨는 주말에 출근하지 않았다. A 씨는 밀린 급여를 타내기 위해 다시 업주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업주는 “일요일에 네가 안 나와 손해를 봤다”며 “남은 임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A 씨는 “연락을 기다렸는데 안 준 것 아니냐”고 따졌다. 되레 업주는 “내가 피해 본 만큼 너한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놨다. 터무니없는 협박이지만 A 씨는 상담을 받기 전까지도 자신이 소송에 걸릴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50대 여성 B 씨도 서울 한 식당에서 일했다. 식당 사장으로부터 받기로 한 급여는 월 100만 원 수준. 최저급여보다 훨씬 적은 돈이지만 생계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식당 사장은 첫 출근일로부터 한 달쯤 뒤 B 씨에게 “요즘 장사가 안 되니 월급을 줄 수 없다”며 “이젠 나오지 마라”고 했다. B 씨가 “월급을 달라”고 사정하자 사장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주느냐”며 윽박질렀다.
이 같은 사실은 B 씨의 딸이 B 씨 몰래 강화연 대표를 만나면서 알려졌다. 식당 사장은 딸의 전화에도 “경영사정이 어려워 줄 수 없다”고 버티다가 몇 주 뒤에야 마지못한 듯 급여를 지급했다. 강 대표는 “회사 경영이 어려운 건 사용자 책임이지 노동자 책임은 아니지 않느냐”며 “특히 B 씨는 다른 사업장에서도 똑같은 수법으로 소액 임금을 체불 당한 바 있다”고 밝혔다.
상당수 노동자가 임금체불을 감수하는 건 시간이 지나면 밀린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같은 믿음으로 C 씨는 3개월 넘게 월급을 주지 않는 회사에서 일했다. 밀린 급여는 1000만 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C 씨는 카드대출로 생활했다. ‘며칠만 기다리라’는 사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C 씨에게 돌아온 건 카드빚과 배신감뿐이었다.
강 대표는 “많은 사용자가 각종 유지비, 임대료보다 인건비를 뒷전으로 여기고, 월급 주는 행위를 마치 은혜 베푸는 걸로 착각한다”며 “상담하다보면 ‘회사가 적자라 돈을 못 준다’고 해놓고, 뒤에선 승용차를 바꾸는 사업주도 많다. 그들에게 기업가로서의 책임이나 도덕성은 찾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또 그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일수록 ‘내가 못 배워서’ ‘내가 못나서’라고 자신을 탓한다”며 “임금체불을 당한 여성 상당수는 영세업체에서 일하고 자녀도 혼자 키워 (부당행위와) 맞서기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실제 임금체불로 최근 경찰 조사를 받은 노동자들은 건설 일용직이거나 비정규직 등 사회 안전망 바깥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월 26일 경남 창원중부경찰서에 협박미수 혐의로 체포된 이 아무개 씨(45)는 일용직 굴삭기 운전사다. 그는 임금 700만여 원이 체불되자 홧김에 “원청회사에 화염병을 던지겠다”고 신고했다가 입건됐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 안양시 만안구 한 공사현장에서 투신 소동을 벌인 변 아무개 씨(52)는 목수로 알려졌다. 변 씨는 공사대금 750만여 원을 받지 못하자 건물 6층에 올라갔다. 이에 앞서 같은 달 15일 제주에서는 임금체불 시위를 벌이던 최 아무개 씨(48)가 투신 소동 가운데 기물파손 혐의로 체포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설을 앞두고 반짝했던 임금체불 이슈는 다시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하다. 박상천 전국운수산업 민주버스노조 위원장은 “최근 한 버스업체가 기사들 복리후생비로 나온 돈을 횡령해 부평경찰서에서 수사가 진행 중인 걸로 안다”고 말했다. 노동자에게 마땅히 지급해야 할 보상을 주지 않은 것도 임금체불이란 주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임금체불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만이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당장 누리과정 지원 예산이 끊기면서 유치원·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은 임금체불의 위험에 노출됐다. 또 드라마·영화 제작 현장에서도, 언론·출판사에서도 상시적인 임금체불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상하게도 일한 만큼 돈을 벌지 못한 ‘흙수저’가 너무 많은 듯 보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
체불임금 어떻게 받아야 할까 ‘소액 체당금’은 정부가 대신 지급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사장이 “월급을 못 주겠다”며 연락을 피한다고 가정하자. 어느 곳에 먼저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한 게 사실이다. 급한 대로 경찰서를 찾지만 경찰이 밀린 임금을 대신 받아주진 않는다. 임금체불을 당했을 때 해결 절차는 따로 있다. 이관수 노무사는 “사업주는 근로자의 퇴직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임금이든 퇴직금이든 지급하게 돼 있다”며 “임금체불 사건의 60~70%는 근로감독관이 사업주에게 시정기한을 통보하고 시정기한에 맞춰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유병무 노무사는 “임금체불 사건의 경우 사업주가 ‘임금을 지급했다’ ‘안했다’ 사실 확인이 분명한 편이라 되도록 신고해서 받는 편이 좋다”고 조언했다. 사업주가 시정기한까지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 형사 입건된다. 이때 밀린 임금을 받으려면 별도의 민사소송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복잡한 소송 절차는 일반 시민에게 버거울 개연성이 크다. 이 노무사와 유 노무사는 한 목소리로 “법률구조공단을 찾으라”고 권했다. 월급 400만 원 이하 근로자가 임금체불을 당했을 때 법률구조공단은 무료로 소송을 맡아준다. 이 노무사는 “노동청 진정까지는 근로자 혼자 할 수 있지만 민사 단계부터는 법률구조공단에 위임하는 것이 좋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비용절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사업주 대신 밀린 임금을 지급하는 ‘소액체당금 제도’도 알아두면 유용하다. 유 노무사는 “지난 6월부터 시행된 소액체당금 제도는 일반체당금과 달리 월급 300만 원 이하 6개월 이상 재직 시 신청할 수 있다”며 “지급명령 이행결정 등 민사 판결이 확정되면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체당금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체당금 제도의 단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유 노무사는 “임금체불 재판은 약식이라도 2~3개월이 소요된다”며 “실제 밀린 임금을 정부로부터 받으려면 5개월 이상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