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특히 대검 중수부의 강력한 ‘의지’와 ‘로비 명단’의 실재 여부, 정몽구 회장의 ‘입’에 따라 정치권에 대대적 사정이 몰아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검찰이 “5·31 지방선거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해 5월 초까지는 수사를 종결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대대적 사정 국면으로 가기에는 시간상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검찰이 이번 사건에서 확보한 각종 고급정보가 지방선거 뒤 정계개편 과정에서 정치권의 지각변동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다 이번 사건에 전·현직 경제관료가 다수 연루된 것을 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건수’도 갑자기 튀어나올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정치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추적해봤다.
대검 중수부는 이번 현대자동차 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결기’에 차 있다고 한다. 중수부는 지난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사건, 경기도 광주 오포읍 아파트 비리 사건 등의 정치권 관련 수사를 처리했지만 그 결과가 ‘부실’했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론스타 사건 수사에 중수부의 ‘명예회복’ 여부가 달려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중수부 직원들이 지난해 큰 사건을 많이 처리했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사건도 서울중앙지검으로 넘어가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현대차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사건이 많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맡고 나서 그 동안의 침체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다. 수시로 다른 부서로부터 인력을 ‘수혈’받아 이번 사건 수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대검 중수부가 자존심을 걸고 하는 수사다. 용처 수사에서 실세 정치인 1~2명이 나오지 않으면 면(面)이 서지 않는다”는 요지의 발언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만큼 이번 사건을 다루는 중수부의 칼에 날이 서 있다는 얘기다. 정치권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현재 정치권이 주목하는 부분은 검찰이 비자금 사용처에 대한 ‘확실한’ 리스트를 확보했느냐의 여부다. 먼저 중수부는 현대차 계열사인 글로비스 사무실의 벽 속 비밀금고에서 비자금 입출금 내역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먼저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이에 대해 “비자금을 받은 리스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비스 금고의 입출금 내역이 담긴 장부는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입출금 내역에 적힌 이름을 의미하는 영문 이니셜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채 기획관은 “기업이 (거물급 정·관계 인사 등) 중요한 사람에게 돈을 준 경우 대개 이름을 기록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비록 명단에 이름을 의미하는 영문 이니셜이 적혀 있지만 그것이 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자금이 들어오거나 나간 계열사 또는 직원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럴 경우 검찰은 비자금 용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몽구 회장을 반드시 소환조사해야 할 입장이다. 정 회장이 비자금 사용 대상자를 ‘기록’하지는 않았더라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이 정 회장 귀국을 위해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한 것도 결국 비자금의 ‘출구’를 찾아내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문제는 정 회장의 ‘입’이다. 검찰이 정치인 리스트를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 정 회장의 진술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검찰에 소환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일부 정치인의 이름을 ‘손보기’ 차원에서라도 언급해버린다면 정치권에 큰 파장이 불 수밖에 없다.
검찰 주변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친밀한 여권 인사들이 리스트 대상자로 거명됐다. 그런데 정 회장이 여야의 거의 모든 의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로비를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정 회장이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검찰과 일종의 ‘빅딜’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그가 여야의 중진 의원 몇 명을 언급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정치인들도 대거 소환대상에 오를 상황도 예상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 현대차그룹 직원이 300여 명 정도 동원된 정몽구 회장의 입국 장면. | ||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현대차 비자금을 이용해 여당과 야당 로비를 각각 담당한 고위 임원들과 이들로부터 후원금과 비공식 정치자금을 전달받은 정치인의 이름과 액수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그중에는 경제부처 고위관료와 실세 장관, 국회의원 등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이 글로비스 ‘장부’를 토대로 그 칼끝을 정치권으로 겨누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최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 “조만간 출구에 해당하는 정·관계 로비 등에 관해 철저하고 신중한 수사를 개시한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사용처에 대한 정치권 수사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밝혔다.
이 같은 검찰의 압박 분위기에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직 출국금지조치가 내려진 정치인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일부 정치인은 이미 검찰 사정권에 들어선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검찰 수사착수 초기에 거론된 전직 고위 경제관료 외에 현직 장관,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 등 3~4명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현재로서는 검찰이 지금까지 거명된 몇 명만의 정치인을 ‘처리’하는 수준에서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종결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검찰 스스로 “국민경제와 5·31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5월 초까지 수사를 종결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정치권 전반에 대한 사정국면 조성은 일정상 무리이기 때문이다.
여권의 시각도 그런 편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는 정치권의 한 관계자도 “여권이 이번 사건을 제2의 불법 대선자금 국면으로 몰고 갈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정치인 몇 명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 노 대통령 임기 초반에 불어닥친 대선자금 수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 대통령 간에 조성된 갈등 국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 수사는 그것과는 다르다. 현 정권이 경제계와 관련된 비리가 워낙 많은 것을 인식하고 손을 한번 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국부 유출 등에 관한 국민 여론도 상당히 안 좋은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현대차 비자금 수사의 ‘뇌관’이 지방선거와 그 뒤 전개될 정계개편 과정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검찰이 이번 사건을 정치인의 대대적 사정으로 끌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국정 후반기에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강현욱 전북도지사의 지방선거 불출마에 여권이 개인 비리를 매개로 그를 ‘주저앉혔다’는 구설이 나오고 있지 않느냐. 이런 점에서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X파일도 지방선거 뒤 정계개편 과정에서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특히 이 의원은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과거 김대중 정권 시절의 인사가 많이 관여돼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권이 지방선거 뒤 민주당과의 합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차 리스트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검찰의 현대차 비자금 수사는 친 한나라당 성향의 기업 자금이 야당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현재로서는 현대차 비자금 사건이 어디까지 그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정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폭탄 발언을 할 가능성도 있다. ‘출구와 입구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천정배 장관의 호언도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대검 중수부의 의지도 결연해보인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이 정치권 전반을 뒤흔들어 놓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상존한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월 28일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강연 때 했던 발언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은 이 날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고위인사들 수준에서 부정한 일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외화은행 매각 건이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별건’이긴 하지만 김재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외환은행 건에 대해서 그런 언급을 했다는 것은 이번 ‘김재록 게이트’에 대한 전체적인 수사 가이드 라인을 정해주는 것 같다. 이럴 경우 현대차 비자금 사건도 정치권 전반에 대한 대대적 사정은 별로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도 “대통령이 수사지침을 하달한 것”이라며 “철저한 수사를 위해 특검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차 비자금 수사가 정치권 전체를 뒤흔들 ‘위험한 질주’는 아닐지라도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공포의 ‘변속기어’로 작동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