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철 감독 | ||
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보자. 이 감독은 최근 두 달간 선 감독을 상대로 호전적인 발언을 많이 했다. “삼성의 라이벌은 LG밖에 없다” “삼성은 기동력이 부족한 팀이니 뛰는 야구를 되살리면 LG가 언제든 이길 수 있다” “정규시즌서 삼성과 붙게 되면 총력전을 펼치겠다” 등 흥미진진한 코멘트를 펑펑 쏟아냈다.
이후 선 감독에게 무수한 질문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때로는 전화 취재를 통해 “이순철 감독이 이러저런 얘기를 했는데 선 감독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선 감독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라이벌로 생각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 한판 붙고 싶든 말든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전해 달라”며 다소 냉소적으로 대꾸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월 말 오키나와 전지훈련지에서 이 감독은 한국 취재진에게 “임창용과 우리팀 진필중을 트레이드하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니겠는가”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가 혼쭐이 났다. 한국 언론 특성상, 이 얘기는 “임창용과 진필중을 맞바꾸자”라는 식의 직접화법으로 돌변해 여기저기 소개됐다. LG 유성민 단장까지 가세해 “임창용이 팀내에서 왕따 취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윈-윈 차원에서라도 진필중과 맞바꾸자”라고 얘기하면서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이 감독이었다. 삼성측에서 “미친 소리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라며 거친 반응이 나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시즌을 코앞에 둔 상황서 타 팀 선수에 대해 욕심을 낸다는 얘기는 프로야구 관례상 예의가 아니다. 또한 이 감독의 발언은 이후 묘하게 선 감독 체제를 뒤흔들려는 의도인 것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이 감독은 삼성과의 오키나와 연습경기 때 선 감독을 만나 “본뜻이 아니었다”며 화해했다. 이후 줄기차게 주장했던 라이벌론에 대해서도 되도록 언급을 피하고 있다.
광주 송정동초교-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해태(선동열), 광주 정람초교-전남중-광주상고-연세대-해태(이순철).
널리 알려졌다시피 선동열 감독과 이순철 감독은 85년에 나란히 해태에 입단해 95년 말 선 감독이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 11시즌 동안 한솥밥을 먹은 절친한 동기생이다. 중요한 건 투수와 외야수라는 포지션 때문에 직접 비교대상이 되지 않았을 뿐 둘은 어린 시절부터 근본적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왔다는 점이다.
두 감독의 출신 학교를 살펴보면 철저하게 카운터파트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일고와 광주상고(현 동성고)는 광주 야구를 이끌어온 양대 산맥이었다. 광주일고에 선동열이란 국가대표급 투수가 있었다면 광주상고에는 이순철이란 호타준족의 타자가 있었다. 게다가 사학 라이벌인 고대와 연대로 각각 진학했다. 해태가 밥 먹듯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나란히 공헌했지만, 근본적으로 두 감독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학창 시절을 겪은 셈이다.
▲ 선동열 감독 | ||
이순철 감독은 승부욕이 강한 인물이다. 하지만 동기생에게 이유 없는 시비를 걸 정도는 아니다. 그런 이 감독이 잇달아 “삼성, 한판 붙자”라고 얘기해왔던 이유는 뭘까.
침체된 한국프로야구에 흥미 요소를 불어넣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지난해 11월 취임한 뒤 선동열 감독은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이 감독은 무엇보다 삼성 라이온즈와 선 감독에게 시비를 걸었을 경우 생겨날 수 있는 파급효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듯 보인다. 팬들의 관심이 모아질 게 당연하다. 기아와 더불어 고정팬이 많기로 유명한 삼성, LG 팬들의 흥미를 유도해낼 수 있을 뿐더러 타 구단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게다가 이 감독에게 있어 선 감독은 막말을 해도 될 만큼 막역한 사이다. 이 감독이 ‘내가 한번 나서보자’는 생각을 했을 만하다. 결국 “동열아! 한판 붙자”라는 말로 심정을 표출했다. 양 팀의 팬들도 한동안 소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 감독은 여전히 “동열이가 조금만 더 화끈하게 반박해주면 말싸움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라며 웃고 있다.
선 감독이 이 감독의 도발에 좀처럼 대응하지 않았던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 감독은 “아직 시즌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견제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응대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 때를 기다리겠다는 생각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다. 상대방이 잽을 날릴 때에는 참고 있다가 한방에 카운터블로를 날리겠다는 작전이다.
이를 증명하듯 조용하던 선 감독은 1월 말 괌 전지훈련 때 ‘7개 구단이 우리를 공공의 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듯 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감독 전달사항 문건을 선수들의 방마다 내걸게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한국 취재진과의 저녁식사 때 이 사실을 슬며시 흘렸다. 이튿날 스포츠신문들이 이 같은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선 감독은 이 감독을 비롯한 타 구단 사령탑들에게 간접적으로 자신의 의중을 전달한 셈이 됐다.
곧 시작되는 시범경기와 4월의 정규시즌이 개막되면 삼성과 LG는 만날 때마다 혈투를 치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순철 감독의 ‘딴지 걸기’ 덕분에 어쨌든 올 프로야구가 한결 흥미진진해진 것만은 틀림없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