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의원들은 정의화 국회의장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맞서 23일 저녁부터 릴레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첫 주자로 나서 5시간 33분 간 토론을 가졌고, 두 번째 주자로 나선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은 1시간 49분 동안 발언했다.
이어 세번째 주자로 나선 은수미 더민주당 의원은 무려 10시간 18분 동안 토론을 이어가 국내 최장 시간 기록을 세웠다. 네번째 주자로 는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필리버스터 말미에 눈물을 훔치는 은수미 의원.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필리버스터는 주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기타 필요에 따라 의사진행을 저지하기 위해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미국 영국프 랑스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고, 영국 의회에서는 프리부스터(freebooster)라고 한다.
필리버스터의 최장 기록은 1957년 미 의회에 상정된 민권법안을 반대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으로 무려 24시간 8분 동안 연설한 바 있다.
국내에선 1969년 8월 29일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발언한 것이 최장 기록이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의원 시절인 1964년 4월 21일 임시국회에서 박정희 정권이 한일 비밀회담을 통해 “일본자금 1억 3000만 불을 수수했다.”는 발설로 구속동의 요청을 받은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국회동의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트에 나서 5시간 19분 간 연설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6대 국회 개원후 6개월 동안 본회의 최다발언 의원(13회) 기록을 갖고 있고, 국회에서 줄곧 중요 문제가 생길때마다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를 들어 정부여당을 궁지에 몰아 넣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회에선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 폐지됐다. 1971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박정희 대통령은 1년 뒤인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과 정당 활동을 중단시키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그리고 1973년 국회는 합법적인 의사진행발언인 필리버스터 마저 폐지했다.
필리버스터 최장 시간을 갈아치운 은 의원은 토론장에서 “1973년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던 박정희 시절을 암흑시기라 부른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다시 필리버스터가 폐지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정권때 폐지된 필리버스터가 박근혜 정권에서 부활한 탓인지 아니면 현안 법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탓인지 박 대통령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24일 국민경제자문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10여 차례 책상을 내리치면서 노동개혁 4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테러방지법 등 쟁점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야당이 진행하고 있는 필리버스터와 관련해서는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얘기인지, 이것은 정말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비난했다.
유신정권때 폐지된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에 맞서 무려 43년 만인 박근혜 정권에서 부활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유산(유신)이 오버랩되는 게 싫은 것일까. 아니면 쟁점 법안 처리 지연으로 민생 및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정치상황이 아쉬운 것일까. 총선을 앞두고 예상치 못한 이슈로 부상한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박 대통령의 복잡한 속내가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