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 일요신문DB
비박계는 이한구 위원장이 친박계가 원하는 전략공천을 통해 대대적인 공천 학살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위원장을 친박 진영이 내세운 저승사자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이 위원장은 ‘친박’으로 분류된다. 친박계가 공관위원장 자리에 이 위원장을 적극 밀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 친박계 의원은 “2014년 김무성 대표가 당권을 잡은 이후 친박 의원들은 물갈이될 것이란 불안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김 대표의 공천 독주를 막을 인사가 필요했다. 경력이나 성격 등을 봤을 때 이 위원장이 최적임자”라고 귀띔했다.
공천 방식을 놓고 이 위원장이 김무성 대표와 날선 공방을 벌이자 친박계 내부에서 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이 의원이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박계 아니냐. 핵심부와 이 의원 사이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친박도 안심할 수 없다는 관측이 확산되고 있다. 이 위원장 칼날이 비박만을 겨누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 위원장은 사석에서 “18대 총선 공천 땐 친박이, 19대 땐 친이가 학살을 당했다.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이번엔 특정 계파라고 해서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 위원장을 향해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친박으로선 실망스러운 발언이다.
청와대도 못마땅해 하는 기류다. 청와대는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공천은 당에서 할 일’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친박 핵심부가 구상해온 TK 현역 물갈이의 배후엔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청와대는 4월 총선에서의 결과가 박근혜 대통령 남은 임기를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공천과 관련한 세세한 부분까지 챙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현재 청와대와 이 위원장 사이엔 특별한 라인이 없는 것으로 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청와대가 컨트롤을 할 수도 없고, 또 이 위원장이 그렇게 될 사람도 아니다. 이 위원장이 공천만큼은 전권을 가지고 행사하려는 것 같다. 이 위원장이 청와대나 친박 쪽에 유리하게 공천을 심사할 것이라고 점치기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친박 원로 인사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 위원장은 본인이 친박에 특혜를 줄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해 대해 상당히 불쾌해했다. 오히려 이 위원장은 몇몇 핵심 친박 의원들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고 들었다”면서 “자존심이 강한 이 위원장 스타일상 오히려 친박에 더 가혹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유승민 의원을 놓고선 이 위원장과 친박 핵심부 간 입장이 확연하게 엇갈리는 모양새다. 이 위원장은 2월 1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유 의원의 컷오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유 의원이) 최소한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성과자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유 의원의 공천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내다본 것이다.
이는 유 의원을 바라보는 친박 핵심부의 싸늘한 시선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청와대가 이른바 ‘진박 마케팅’을 펼쳐 TK 물갈이에 나서게 된 배경은 유 의원에 대한 배신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 의원만큼은 이번 총선에서 반드시 낙선시켜야한다는 게 친박 저변에 깔려 있는 인식이다. 유 의원이 친박의 집중적인 공세에도 불구하고 공천을 받아 당선될 경우 박 대통령 레임덕은 앞당겨질 것이란 게 정가의 우세한 견해다.
더군다나 유 의원은 올해 7월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비박계가 내세울 당 대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차기 대표는 대선을 치르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다. 친박계는 좌장 격인 최경환 의원이 출사표를 던질 것이 확실시된다. 지난 2014년 서청원 의원 패배를 앙갚음하는 것을 넘어 당권을 장악해 향후 국정 주도권을 잡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곧 친박계가 유 의원의 국회 입성을 막아야 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청와대는 이 위원장과의 핫라인을 개통하기 위해 여러 라인을 동원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친박 진영에선 이 위원장과 관련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비박 X맨 아니냐”와 같은 말이 들리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 위원장이 김무성 대표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지만 당 내 속사정을 살펴보면 친박 역시 이 위원장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앞서의 친박 원로 인사는 “이 위원장은 친박임에도 불구하고 권력 핵심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다. 일부 친박 참모들이 경제부총리 등 하마평에 올랐던 이 위원장을 비토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면서 “이를 알고 있을 이 위원장이 친박계를 상대로 매서운 칼을 휘두를 수 있다. 여의도 주변에선 청와대가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진박’의 절반이 공천을 받지 못 할 것이란 말도 나오고 있어 그 진위를 살펴보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정치권에선 우선 이 위원장이 친박 의원들 중 몇 명을 컷오프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그동안 비박계에 대한 물갈이 명분을 쌓기 위해 친박 중진 일부를 희생양 삼을 것이란 전망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 위원장이 이를 뛰어넘는 수준의 공천을 단행할 것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칼자루는 이 위원장이 쥐고 있다. 정해진 기준대로 심사하겠다는 이 위원장 말이 정치적 수사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위원장을 적으로 생각했던 비박계보다는 아군으로 생각했던 친박의 충격이 더 클 것이다. 앞으로 이 위원장과 친박 간 수 싸움을 지켜보는 것도 새누리당 공천의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