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다(野生野死)’는 ‘구도(球都)’ 부산의 사직구장을 찾았다. 이날은 프로야구 최고의 ‘빅게임’으로 불린 삼성과의 3연전 첫날이라 경기 시작 세 시간 전부터 야구장에 몰려든 롯데 팬들은 경기 한 시간 전에 이미 1루쪽 상단까지 빼곡히 들어찼고 경기 시작 직전에는 평일임에도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산 시민들이 야구장을 찾았다.
올시즌 프로야구 흥행의 진원지로 꼽히는 롯데자이언츠의 홈 사직야구장은 롯데 경기가 열릴 때마다 부산 전체가 들썩거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팬들의 열렬한 응원이 또 하나의 볼거리로 등장했다. 롯데 치어리더 옆에 앉아 9회 동안 광란의 응원 문화에 흠뻑 빠졌던 그 현장 속으로 ‘빠~져’ 보자.
30분 전 이미 1루쪽 관중석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보다는 학생들이 훨씬 많아 보였다. 간혹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주머니와 나이 든 어른들이 김밥과 음료수를 들고 자리를 찾는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 젊은 사람들로 꽉찬 관중석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응원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롯데 응원단장인 남성훈씨가 단상에 올라가 분위기를 잡자 관중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유명한 ‘영광송’을 ‘롯데송’으로 개사해서 부르는 걸 시작으로 본격적인 응원이 시작됐는데 응원석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롯데 롯데 롯데 롯데 롯~데’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응원 열기로 관중석이 들썩이는 가운데 한 무리의 넥타이 부대가 등장했다. 치킨, 캔맥주, 김밥, 소주팩 등이 가득 담긴 비닐봉투들을 들고 20여 명이 단체로 1루 응원석을 지나 외야쪽으로 향했다.
정체가 궁금해서 그들을 뒤쫓았는데 모 해운회사 영업팀 직원들이었다. 한 사람 옆에 다가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이 시간에 야구장에 와 있는 거 알려지면 회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면서 사진 촬영은 고사했다. 직원들이 워낙 야구를 좋아해서 롯데 홈경기가 열린 날이면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걸로 회식을 대신한다는 그는 “조금 있으면 한 열 명 더 올 것”이라면서 “요즘엔 여직원들이 야구장 가자고 더 성화를 부린다”며 야구 열기를 전했다. 그런데 여직원은 공짜라고. 표값은 남자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걷어서 대신 내준단다.
또 다른 사람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롯데가 너무 부진해서 경기 끝나고 소주 마시는 게 다반사였는데 요즘은 소주를 마셔도 신나서 기분 좋게 마신다”며 최근 롯데의 분전을 즐거워했다.
5분 전 경기 시작 5분 전에 ‘야구장의 꽃’ 치어리더가 단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치어리더의 등장에 관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눈길을 떼지 못했다. 빼어난 얼굴과 몸매의 치어리더가 단상에 오르자 분위기는 절정에 달았다. 아직 야구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응원단장의 구호 소리에 치어리더와 팬들은 일심동체를 이뤘다. 분위기를 확 띄우기 위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부산 갈매기’ 노래가 울려 퍼졌다.
관중들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비록 경기 시작 전이지만 그들한테는 ‘부산 갈매기’란 노래 자체가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모양이다.
4회 ‘터졌다’ 이날 양팀 선발은 롯데 손민한과 삼성 해크먼. 두 선수는 3회까지 단 1안타만 허용하는 팽팽한 투수전을 벌였다. 그러나 4회 롯데의 선두 타자 신명철이 2루타를 치며 드디어 공격의 신호탄을 날렸다. 어렵게 살린 기회를 5번 펠로우가 좌익수 앞 2루타를 터트리며 신명철은 홈인했고 이어 손인호의 적시타로 펠로우까지 홈으로 들어오면서 롯데는 2-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응원석은 난리가 났다. 치어리더 앞에 앉아있던 기자도 치어리더의 응원도구를 빌려 ‘돌아와요 부산항에’ ‘아파트’ 또다시 ‘부산 갈매기’를 목 놓아 부르며 절로 롯데의 광팬으로 변해 갔다.
제대 후 잠시 집에서 쉬고 있다는 나찬진씨(23)는 신문지 응원을 마친 후 부산의 야구 응원이 유독 다른 지방보다 훨씬 더 뜨거운데 대해 “부산 사람들의 가슴이 뜨겁다. 그 뜨거운 가슴을 달궈주기도 하고 식혀주는 것이 야구”라며 롯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씨는 정수근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열심히 뛰는 정수근식 야구가 롯데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다고 치켜세웠다.
5회, 휴식시간 5회가 끝난 뒤 매점을 찾았다. 줄줄이 늘어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사직구장에서 2년째 매점을 운영중이라는 이두찬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에 너무 수입이 안좋아 매점을 닫으려 했는데 올해는 롯데 선수들이 너무 잘해줘서 이뻐 죽겠다”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고.
경기장 한켠에서 잠시 쉬고 있는 치어리더를 만났다. 치어리더 경력 3년째라는 배해영씨(22)는 롯데 응원단의 막내였다. 커다란 눈이 인상적인 배씨는 서울 부산을 오가는 장거리 여정이 힘들긴 해도 부산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접할 땐 전혀 힘든 줄 모르겠다며 팬들의 응원에 감사함을 전했다.
“부산 분들의 응원은 소문 그대로다.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선수들을 응원해주는 팬들은 부산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번 두산과의 경기에서 1-8로 졌는데도 선수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부산 갈매기’를 연호했다. 선수들도 감동했을 것이다.”
응원에 힘을 얻는 치어리더지만 역시 고충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장난기 많은 팬들의 짓궂은 행동들이다. 특히 요즘엔 디카와 폰카로 치어리더의 은밀한 부분만을 찍어대는 사람들 때문에 경호원들이 사진촬영을 통제할 정도다. 배씨는 “어떤 분은 아무 말 없이 다리만 만지고 간 분도 있었다. 그때 정말 놀랐다.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시선들만 없다면 치어리더는 정말 최고의 직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치어리더인 백수현씨(23)는 “부산팬들이 만들어준 카페가 있다. 그 카페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 다른 데서도 응원을 해봤는데 부산 시민들의 응원이 ‘짱’”이라며 부산 야구팬들의 뜨거운 야구 열기를 설명했다.
응원석에서 만난 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허명씨(66)의 손에는 롯데 선수들의 프로필이 깨알같이 적혀있는 수첩이 눈에 띄었다. 알고보니 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될 때부터 롯데의 팬이었고 아들이 야구선수였다면서 워낙 롯데팀을 좋아하다보니 선수들의 사소한 기록까지 다 외울 정도라고 자랑이다.
6회 이후 6회가 지나면서 나타난 응원석의 두드러진 특징은 술을 마신 관중들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6회 이후 치어리더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난 것이 이채로웠다.
그래도 응원만큼은 신나게 했다. 술에 취하면 취한 대로, 야구에 취한 사람은 그 기분대로, 응원에 취한 사람은 신나는 마음으로 ‘그들만의 문화’ 속에 빠져 들었다.
주점서 ‘10회’ 삼성이 7회 1사 후 양준혁의 2루타에 이어 터진 박한이의 우전 적시타로 한 점을 따라 붙자 관중들도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얼마든지 뒤집기가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8회 용병 라이온과 펠로우의 잇단 적시타에 힘입어 4-1로 달아나면서 롯데 응원석은 거의 승리를 확신한 분위기였다. 9회초 삼성이 점수를 내지 못하자 결국 롯데의 승리로 ‘거함’ 삼성을 잡는 뜻깊은 결과를 도출해냈다.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야구장 밖으로 나왔다. 삼성을 이겼다는 사실에 롯데팬들은 엄청난 기쁨을 만끽한 듯 경기장 밖에서도 어깨동무를 하며 ‘부산갈매기’를 불러 제쳤다. 특히 조용필 콘서트를 홍보하려는 탑차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반복돼 흘러나오자 수많은 야구팬들이 그 차 앞으로 몰려가 다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응원 뒤풀이를 만끽했다.
야구장 앞의 주점들은 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중 한 호프집에서 만난 야구팬은 자신을 신발업계 종사자라고 소개하면서 “롯데가 살아야 신발산업도 살아난다”면서 “져도 끈기있게 최선을 다하는 롯데 선수들의 근성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입장료는 5천원밖에 안 내는데 경기 후 술값만 5만원이 넘게 나간다고 하소연하면서도 표정은 결코 싫지 않은 눈치다.
호프집을 나오는데 저녁 내내 오락가락하던 비가 결국 쏟아져 내렸다. 우산을 쓸 생각도 없이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야생야사’ 부산 야구팬들의 현주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