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테네올림픽 이후 여러 소문과 사건과 부상에 시달린 유승민이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올림픽 이후의 ‘천재’
유승민은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엄청나게 수직 상승돼 있음을 절감했다고 토로한다. 운동이란 게 컨디션의 상태와 상대 선수의 전력에 따라 승패가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승민이 뛰는 경기는 무조건 이기길 바라는 팬들의 반응에 조금은 힘들었다는 게 ‘겪은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다.
“전 올림픽에서 금메달 땄을 때도 이 점을 분명히 말했어요. 제가 올림픽에서 1등을 할 수 있었던 건 기회와 컨디션이 좋았던 행운 때문이었다구요. 올림픽에서 1등을 했다고 해서 다른 대회에서 다 1등을 따낼 수는 없는 것이고 앞으로 이기는 게임보다 지는 게임이 훨씬 많을 거라는 예상도 덧붙였죠. 하지만 그래도 절 믿고 응원해주시면 그 응원을 배신하지는 않겠다고 부탁을 드렸는데 저에 대해 많이 조급해 하셨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구설수가 너무 많았잖아요.”
유승민은 올림픽 이후 약 세 달 정도까진 외출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와! 유승민이다!”하면서 사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성적이 신통치 않자 “유승민 지나간다”면서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만 늘어났다는 것. 당연한 반응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아주 ‘쬐금’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예인들하고만 어울렸다?
유승민은 올림픽 이후 약 두 달 동안은 방송 출연이 줄을 이었다. 갖가지 행사와 여의도를 들락거리며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그런 가운데 방송과 신문에서만 봤던 연예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모임을 갖기도 했다. 유승민으로선 새로운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어가며 자신이 모르고 있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작용했지만 사람들한테는 유승민이 연예인들과 어울리느라 훈련을 소홀히 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
“자주 만났던 건 아니에요. 대부분 개그맨 형들인데요 뭘. 사람들 시각 참 이상해요. 운동선수가 연예인을 만나면 왜 잘못 되는 거라고 생각하죠? 나빠질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즐겁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탁구에 대한 관심을 유도할 수 있고 탁구를 홍보할 수도 있구요. 만약 운동하는데 지장을 줬더라면 제가 왜 만나겠어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개그맨들 중에서 특히 김제동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한다. 외국을 돌아다니느라 바쁘게 보내는 유승민으로선 김제동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그의 남다른 관심과 응원에 큰 힘을 얻게 된다.
▲ 아시아선수권에 출전한 유승민. | ||
“정말 그분한테 미안해 죽겠어요. 제가 드라마 <야인시대> 팬이었거든요. 어느날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이세은씨가 일일 DJ를 맡아서 진행을 하시더라구요. 저보다 두 살 연상이라 편하게 얘기를 주고받았고 마침 가지고 있던 올림픽 기념 시계를 선물로 드리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스캔들로 기사화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만들었어요.”
유승민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세은과 개인적인 만남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문자만 몇 차례 주고받다가 ‘밥 한번 먹자’고 얘기만 꺼내놓았을 뿐 사적인 감정으로 만나지도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주위의 오해 섞인 시선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됐겠지만 아무리 곱씹고 되짚어 봐도 이세은과의 스캔들은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네티즌들이 정말 무섭구나 하는 걸 제대로 느꼈어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글을 올려놓으니까 수습이 안되더라구요. 앞으론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일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게 다 자기 맘 같지 않다는 것도 느꼈고….”
여자친구와 결별
이상하게 얄궂은 질문들이 계속 나왔다. 하지만 유승민은 다소 껄끄러운 질문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쏟아냈다. 아테네올림픽 당시 엄청난 관심을 모았던 탁구 선수 출신의 여자친구와 유승민은 올림픽 직후 헤어졌다. 진짜 이유가 궁금했다.
“그 친구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서로 오해가 많았어요. 저 또한 바쁘고 예전처럼 신경 써주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친구 입장에선 서운할 수도 있었겠죠. 오해가 쌓이고 그 쌓인 오해를 풀다가 또 싸우고, 좀 많이 힘들었어요. 그 친구 주위 사람들은 제가 연예인들을 만나러 다니고 방송국에서 예쁜 여자들을 많이 보니까 마음도 변했을 거라고 부추겼던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전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했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어요. 다툼이 잦아지고 그 감정이 쌓이다보니까 나중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내몰렸죠.”
유승민은 올림픽 때문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왕하오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그녀’였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개할 만큼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대단했지만 ‘공인’이 돼 버린 유승민과 ‘공인’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이해하고 포기해야 하는 여자친구는 세상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랑 헤어진 지 꽤 오래 됐어요. 올림픽 직후였으니까 1년이 다 돼가네요. 가끔 그립고 생각이 나요. 한번쯤 다시 만나보고 싶긴 한데 그럼 뭐하겠어요? 앞으론 여자친구가 생겨도 절대 말 못할 것 같아요. 너무 크게 겪어서. 그 친구도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거든요.”
▲ 지난해 아테네올림픽 우승 당시. | ||
유승민은 올림픽 이후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놀러갔다가 너무나 황당한 일을 겪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갑자기 플래시가 터지는 걸 느꼈고 이후엔 여기저기서 카메라폰들이 등장했던 것. 그곳에 온 사람들이 유승민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이후 기념으로 저마다 사진을 찍으면서 유승민은 졸지에 ‘모델’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론 룸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운동선수들이 돈이 많아서 룸으로 가는 게 절대 아니에요.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저희들 생활을 잘 아시겠지만 이렇게 놀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어요. 특히 올해는 국제대회가 대부분이라 한국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다 한때예요.”
제주 대회가 끝나는 대로 중국과 일본을 거쳐 오는 10월엔 유럽으로 돌아다녀야 한다며 한숨을 내쉰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여자친구를 만나려고 했지만 지금은 ‘약간의’ 시간이 있어도 만날 여자가 없다며 헛헛한 웃음을 내보인다.
“전 외아들로 혼자 자라고 운동만 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만남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올림픽 이후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됐고 전 그걸 인간 관계를 넓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다 자기 하기 나름이지. 인간성 좋은 연예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운동하는 걸 알기 때문에 제 몸을 먼저 챙겨주고 신경써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연예인을 만난다고 해서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건 좀 억울해요.”
유승민은 운동만 알고 살아온 삶 속에서 ‘바깥 사람’들과의 교류는 청량제 같은 작용을 했다고 말한다. 이런 저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생도 배우고 운동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10년 후의 모습
인터뷰를 하던 중 갑자기 유승민이 자신의 휴대폰 배경 화면을 기자한테 보여준다. 그곳에는 ‘10년 후를 대비하라’는 글이 떠 있었다. 무슨 뜻인지를 ‘알면서도’ 물어봤다.
“10년 후면 제 나이 서른네 살이에요. 탁구를 계속 할 수도 있고 탁구를 끝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죠.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하려고 해요. 탁구 하나만 보고 가다가 10년 후에 다른 걸 시작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어요. 탁구 지도자도 좋지만 전 사업도 해보고 싶고 유학가서 공부도 더 하려고 해요.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죠. 그래서 사람들 만나는 거나, 관심있게 챙기는 부분들 중에선 탁구 외적인 것들도 있어요.”
유승민은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그냥 ‘운동선수’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엔 ‘탁구선수 유승민’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성적이 별 볼일 없었고 발목 부상에다가 많은 대회에 참가하느라 훈련량이 줄어든 어려움도 있었지만 ‘탁구선수 유승민’이라고 말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부분에서 아테네올림픽이 가져다준 뜨거운 경험이 그를 조금씩 성장시키고 있는 것만 같다.
유승민은 인터뷰 말미에 ‘천재’다운 멘트를 통해 기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제가 올림픽에 빠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올림픽에 빠진 것 같아요. 그전 유승민의 모습은 기억하지 않고 중국의 왕하오한테 이긴 모습만 기억하니까요.”
올시즌 오스트리아 프로팀에서 3개월간 임대 선수로 활약하다가 지금은 중국의 프로팀 쓰촨성 소속 선수로 뛰고 있는 유승민과 우리가 ‘올림픽의 바다’에서 헤어나려면 그가 하루 빨리 다른 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해 또 다시 국민들을 흥분의 ‘도가니탕’에서 마구 헤엄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