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최근 보험업계를 비롯한 금융사에 금융감독원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현대해상은 당초 금융감독원 간부 출신인 A 씨를 감사에 앉히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A 씨의 경우 2014년까지 금감원에서 근무해 공직자윤리법이 규정한 ‘취업금지’ 조항에 걸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A 씨의 경우 2014년 퇴직해 지난해 4월 개정되기 이전의 법을 적용받는데, ‘금감원 직원은 퇴직 전 5년 동안 맡았던 업무와 관련이 있는 회사에 2년간 취업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현대해상은 결국 성인석 전 MG손해보험 부사장을 감사로 선임하며 해프닝을 마무리했다.
금융권은 현대해상의 감사 선임 과정을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기업의 경영감시자 역할을 하는 감사 자리가 마치 금감원 전직 간부들의 전유물처럼 다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 감사는 과거 MG손해보험 부사장 취임 당시 재취업 규정 위반으로 해임권고를 받았고, 부당하다며 소송까지 벌이다 결국 물러난 인물이라는 점에서 적정성 논란까지 일고 있다.
성 감사는 2009년 손해보험서비스 국장, 2011년 손해보험 검사국장을 거친 인물로, 지난 2012년 금감원에서 퇴직한 뒤 그린손해보험의 기업개선 대표 관리인을 맡았다. 이후 1년여 만에 그린손보가 MG손보에 인수되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제는 그가 이 과정에서 공직자윤리위원회 심사를 받지 않았다는 점. 이 때문에 성 감사는 과태료와 함께 해임을 권고받았다. 그는 행정소송까지 제기하며 맞섰지만 1심에서 패소하자 지난해 2월 중도 퇴임하며 사실상 이를 수용했다.
이처럼 불명예 퇴진했던 그가 불과 1년 만에 다시 보험사 감사로 복귀한 것을 두고 금융권은 “금감원이 또 개입한 것 아니냐”며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중소형 보험사 고위 관계자는 “퇴임한 나명현 전 감사부터 해프닝의 주인공인 A 씨, 새로 선임된 성인석 감사까지 모두 금감원 간부 출신”이라면서 “현대해상이 장기간 비어 있던 자리를 급하게 채워 넣은 것부터 석연찮다”고 꼬집었다.
현대해상뿐 아니다. 우리나라 주식거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거래소도 민간 기업으로 탈바꿈한 지 1년여 만에 금감원 낙하산의 착륙지가 될 처지다.
한국거래소는 3월 말 임기가 만료되는 김원대 유가증권시장본부장 후임으로 이은태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를 내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원장보는 금감원 임원 인사가 단행된 지난 7일 퇴임한 인물로, 퇴임한 지 1주일여 만에 새로운 직장을 찾은 셈이다.
이 전 부원장보는 옛 증권감독원 시절부터 금감원에 몸담으며 줄곧 증권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공시심사실장과 복합금융서비스국장, 금융투자감독국장 등을 지냈고 2014년에는 금융투자부문 부원장보로 주가연계증권(ELS)을 비롯한 금융투자 상품의 불완전판매 점검을 도맡기도 했다. 그가 증권과 무관한 업무를 했던 때는 회계감독국장을 맡았던 시절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한국거래소 본부장으로 내정되자 금융권에서는 “공직자윤리법은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 전 부원장보의 후임자는 불과 1주일 전까지 자신의 상사였던 사람을 상대로 검사와 감독을 해야 하는 셈”이라며 “한국거래소가 공공기관에서 해제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산하기관 정도로 보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금감원 낙하산 투하지역은 제도권 금융사라는 중심지역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보험업계의 ‘외곽지대’로 분류되는 보험대리점(GA)이 대표적이다. 영세업체 수준이던 GA들이 기존 보험사 영업조직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대형화되자 금감원 출신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 게다가 GA는 강화된 공직자윤리법이 규정하는 퇴직공직자 재취업 심사 대상에서도 제외돼 매력적인 재취업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금융권에는 새로 만들어지는 GA법인들이 감사직을 신설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실제로 이미 대형 GA 중에는 금감원 출신이 감사를 맡고 있는 곳이 꽤 있다. 보험업계 1위인 삼성생명 산하 GA인 삼성생명금융서비스를 필두로 피플라이프, 위홀딩스, 퍼스트에셋 등 대형 GA들이 금감원 출신 감사를 영입했다.
금피아의 영토 확장은 외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동안 계속 외부 전문가에게 맡겼던 조직 내 자리도 은근슬쩍 내부 인사가 꿰찼다. 지난 2월 금감원은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금융소비자보호처장을 부원장급으로 격상시킨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업무이니만큼 조직 수장에게 그에 걸맞은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그동안 감독 부문과 소비자보호 부문을 분리해 외부 인사를 영입했던 자리에 생뚱맞게 내부 인물이 앉게 됐다는 점이다. 소보처 초대 수장은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정책자문위원을 지낸 문정숙 숙명여자대학교 소비자경제학과 교수가 맡았다. 한국소비자정책교육학회장이기도 한 문 교수는 전공이 말해주듯 자타가 공인하는 소비자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2대 오순명 현 소보처장 역시 40여 년간 현장에서 금융소비자들과 함께 호흡한 은행원 출신이다. 1978년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오 처장은 지점장과 영업본부장, 우리모기지 대표 등을 지내 금융소비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후임 소보처장에 내정됐다고 전해지는 인물은 소비자와 거리가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차기 소보처장에는 김수일 금감원 부원장보가 내정돼 선임 절차를 밟고 있다. 김 부원장보는 보험감독원 출신으로 보험계리실장, 총무국장 등을 거쳤으며 현재는 기획 및 경영담당 부원장보를 맡고 있다. 금감원 내부에서도 금융소비자와 접촉은 사실상 전무한 업무만 30년째 해온 셈이다.
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총선이 다가오면서 그동안 금감원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오던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의 시선이 선거 쪽에 쏠리면서 감시 기능이 다소 소홀해진 것 같다”면서 “주주총회가 3월에 몰려 있다는 시기적인 특성도 금감원 출신 영입이 는 것에 한몫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