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검게 그을린 건강한 얼굴로 ‘광양만 사나이’의 진가를 발휘하는 황 코치에게 인터뷰 섭외를 하면서 기자가 농담 삼아 던진 멘트가 생각났다. 인터뷰 주제가 뭐냐는 황 코치의 질문에 기자 왈, “황선홍, 그를 제대로 벗긴다?!” 볼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다며 웃음을 터트린 그였지만 여전히 황선홍 코치의 매력은 진한 ‘인간미’였다.
# 수석 코치의 삶
황 코치는 바빴다. 1군 수석 코치였지만 1, 2군을 오가며 선수들을 체크하고 훈련 일정을 짜는 것은 물론 훈련 이외의 시간엔 비디오 분석을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다. 선수들의 고민이 있을 때는 카운슬러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순간에는 코치가 아닌 형이자 선배로 선수들 앞에 선다. 개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서도 골키퍼 김영광 외에는 대표팀 선수 한 명 없는 전남팀을 허정무 감독과 호흡을 맞춰 조금씩 그 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절로 ‘재미있다’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다.
전남의 올시즌 성적은 1승8무(4월 19일 현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지만 무승부가 너무 많아 당황스럽기까지 할 정도다.
“단일 리그에서 우승하려면 ‘재료’가 좋아야겠죠. 아시다시피 우리 팀은 소위 유명한 선수들이 없잖아요. 그래도 난 선수들을 믿어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언젠가는 좋은 ‘재료’로 성장하리란 사실을요. 가끔 축구 토토를 보면 전남의 이길 확률이 1.5%가 나올 때도 있어요.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성급하게 채찍질하기보다는 믿고 기다리면서 방향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내가 선수를 믿어야 선수들도 날 믿고 따라오는 거잖아요.”
# 아… 동국이…!
이동국이 무릎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사람이 황 코치다. 급기야 이동국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들었는데 92년 자신이 십자인대 부상을 입었을 때와 내용이 너무나 흡사했다고 한다. 그 당시 경기 출전에 대한 욕심으로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다가 10게임 만에 또 다시 쓰러졌던 얘기를 이동국에게 들려줬다는 황 코치는 후배에 대한 회한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국이가 부상당하니까 기사마다 내 이름이 언급되더라구요. 그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이상하게 동국이는 내 전철을 밟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마음이 아프다 못해 쓰렸죠. 부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십자인대가 또 끊어졌을 때였어요.
그땐 정말 축구 인생이 끝난 것 같았으니까. 1년 4개월을 오로지 월드컵만 보고 하루 9시간, 10시간씩 재활 훈련에 매달렸잖아요. 표현할 수 없이 힘들었던 과정들이 프랑스 가기 직전에 물거품이 됐으니 제 인생은 어둠뿐이었죠.”
황 코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까지 쫓아간 가장 큰 이유는 바보, 병신이 된다 해도 월드컵에서 뛸 수 있게 된다면 한 게임만이라도 뛰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내 몸을 보고 있으면 돌아버릴 지경이었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 이런 벌을 받는 건가 하고 신에게 원망도 했었죠. 경기에 나가려고 하루에 17차례나 진통제를 맞기도 했어요.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귀국했을 땐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어요.”
▲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황선홍. 대표팀 감독을 향한 그의 꿈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국이를 싫어하죠? 동국이한테 왜 안티 팬이 몰리는지 이해가 안 돼요. 나야 뭐 미국월드컵 때 ‘개발’차서 그렇다지만 동국이는 그런 일이 없잖아요. 기대만큼 슈팅을 못 때려서 그런 건가? 당해 본 사람만 알아요. 안티팬의 존재가 얼마나 삶을 힘들게 하는지를.”
# 내가 보는 안정환
황 코치는 이동국이 빠진 자리에 누굴 세웠으면 좋겠냐는 ‘예민한’ 질문에 거리낌 없이 대답을 내놓는다. 박주영과 설기현의 포지션을 바꾸거나 조재진도 매력있는 선수임에는 분명하지만 안정환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감독이라면 난 경험을 택할 것 같아요. 월드컵 앞두고 대표팀을 소집해서 한 달 정도 조직력을 갖추게 되는데 그 시간이면 얼마든지 선수들의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거든요. (안)정환이의 빅게임 경험을 결코 무시하면 안돼요. 소속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분위기가 조성되면 얼마든지 자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거든요. 얼마전 매스컴을 통해 정환이에게 ‘정신 차리라’는 쓴소리를 던지기도 했는데 정환이나 (설)기현이가 이번 월드컵에서 해줘야 할 몫은 분명히 있어요. 월드컵이란 무대는 상상 이상의 압박과 긴장과 두려움을 생산해줘요. 그걸 이길 수 있는 힘은 경험밖에 없어요.”
황 코치가 보는 안정환의 최근 문제는 소속팀에서 겉돈다는 것이다. 경기를 지켜보면 안정환에게 공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쉽게 눈치 챌 수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황 코치는 안정환이 소속팀 선수들과의 유대 관계를 위해 밥도 사주고 친밀감을 전하며 자세를 낮출 필요성이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잠깐, 황 코치에게는 6개월 된 아들이 있다. 셋째다.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이 ‘정환’이라고 한다. 안정환과 황정환! 누가 더 잘생겼냐고 물었더니 황 코치 왈, “어휴, 그거야 안정환이 더 잘생겼죠, 하하.”
# 부러운 박지성
“난 지금에라도 일이 없다면 바로 영국 맨체스터로 달려갈 것 같아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으니까. 재밌는 얘기 해줄까요. 처음에 (박)지성이가 맨유 입단한다는 기사를 보고 ‘뻥’이라고 했어요.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지성이가 가는 거야. 난 맨유 홈구장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지성이는 매일 밟고 있잖아요. 그래서 다시 한 번 깨달았죠. 역시 난 실패한 축구 선수라는 사실을.”
황 코치는 선수로서 유니폼을 완전히 벗을 때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은 실패했다고 단정지어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얘길 반복했다.
“내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세요? 바로 꿈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상 치료차 독일에 갔었어요. 그런데 거기 의료진의 말이 3개월 정도 잘 치료하면 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3개월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어요. 월드컵을 앞두고선 3개월이 아니라 3년도 기다릴 수 있었는데 말이죠. 비록 선수 생활은 실패했지만 다른 인생에 승부를 걸고 싶었고 어렵게 결심을 했던 거였어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황 코치는 은퇴 후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바로 대표팀 감독이다. 축구계의 주류로 꼽히는 홍명보 코치가 먼저 대표팀 코치의 길을 밟고 있지만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긋는다. 황 코치는 “사람들은 나와 명보와의 관계를 라이벌로 보는 걸 즐겨하지만 난 한 번도 명보를 그런 존재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설령 홍 코치가 먼저 대표팀 감독에 오른다고 해도 그건 그의 길이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고 넉넉하게 표현했다.
황 코치에게 독일월드컵에서 활약할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특유의 감칠맛 나는 멘트가 이어진다.
“지금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할 때예요. 안 아파도 아픈 것처럼 긴장이 되거든요. 단단히 몸 조심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월드컵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4년 전에는 한국이었지만 이번엔 원정이거든요. 그 차이는 분명 클 겁니다. 위축되지 말고 흐름을 잘 타서 첫 경기를 잘 풀어갔으면 좋겠어요. 나도 독일 가서 마이크 잡고 응원할 겁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