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도전’ ‘아름다운 도전’ 등 이름 앞에 늘 ‘도전’이란 수식어가 훈장처럼 달려 있는 최향남(35·클리블랜드 산하 트리플A 버펄로 바이슨스)과의 전화 연결 시간은 미국에선 하루가 시작되고 한국에선 깊은 수면을 취해야할 극과 극의 상황이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깼다는 최향남이 기자에게 건넨 말, “아직 안 주무셨어요?”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는 곳과 15분 거리에 위치한 버펄로는 최향남이 미국 생활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곳이다. 스프링캠프를 메이저리그에서 보낼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마이너리그였다는 최향남의 고달프면서도 행복하기만 한 미국 생활을 들어 본다.
# 남자와 동거생활
최향남은 얼마전 베네수엘라 용병인 프랭클린으로부터 동거 생활을 제의받았다. 클럽하우스 인근의 맨션인데 한 달 집값이 1600달러다 보니 혼자 지내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언어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최향남은 프랭클린과 생활하다보면 자연스레 영어가 늘 것을 기대하고 지난달 20일 호텔 생활을 청산하고 이사를 했다.
그러나 남미 출신들이 미국 선수들과 문화나 생활면에서 수준이 떨어진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먼저 김치가 문제였다. 미국 선수들은 한국 음식을 인정해줬지만 남미 애들은 냄새가 싫다며 집에선 김치를 먹지 말라고 큰소리 쳤다.
“여기 오래 못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말은 하지 않았는데 속으론 나갈 준비하고 있어요. 700달러짜리 집도 괜찮은 데 많거든요.”
▲ 트리플A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활약 중인 최향남이 미국 야구 ‘선배’인 최희섭과 한 컷. 최향남은 미국행에 대해 좋아서 선택한 길이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 ||
최향남은 미국에서도 노장 중의 노장으로 꼽힌다. 나이 많은 선수가, 그것도 동양에서 온 ‘정체불명’의 투수이다보니 처음 대면한 선수들의 시선은 냉랭함 그 자체였다. 한국에선 ‘문제아’ ‘풍운아’ 등의 타이틀을 죄다 안고 있었지만 미국에서 그렇게 생활했다간 ‘왕따’는 떼논 당상. 그래서 나름대로 작전을 짠 게 ‘스마일’이다. 클럽에서 부딪히는 모든 사람들한테는 무조건 ‘헬로’하면서 인사를 건넸고 얼굴 가득 환한 미소는 ‘부가 서비스’였다.
“제가 그 친구들을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냥 웃으면서 인사하니까 처음엔 모른 척하던 애들도 나중엔 인사를 받더라구요. 아니 이 사람들 이름은 왜 이렇게 길대요? 외우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영어 단어 외우기도 바쁜데 이름까지 외우려니 고역이었죠.”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의사 소통은 정말 어려웠다. 처음엔 한영 사전을 옆에 끼고 선수들과 대화할 때마다 사전을 뒤적였는데 상대방이 너무 불편해하는 것 같아 지금은 그냥 ‘무대뽀’ 정신으로 들이댄다고 한다.
“뭐, 문장으로 거창하게 말할 정도는 못 되구요, 그냥 단어만 나열하는 수준인데 다 알아 듣더라구요. 나도 걔네들 말 잘 몰라요. 단어 몇 개 듣고 이해하는 편이죠. 웃기는 게 농담 삼아 여자 얘기할 때는 공감대가 팍팍 통하는 거예요. 그때는 절로 알아듣게 돼요.”
# 체면 살려준 WBC
미국에서 WBC 본선 대회가 열리자 최향남은 갑자기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한국대표팀이 연일 예상을 뒤엎고 강팀들을 물리치며 상승세를 타자 소속팀에선 한국의 최향남에게 이런 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친근감을 표시했던 것.
최향남으로선 절로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7 대 3으로 미국을 깬 경기 장면에선 최향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때 동료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본 최향남은 ‘최향남표’ 살인미소로 분위기를 한껏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선 자신도 한국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프로에서 뛰었다는 경험담을 털어 놓았는데, 남미에서 온 선수가 이렇게 초를 치고 말았다. “야, 근데 넌 왜 거기 안 가고 여기에 왔냐?”
# 이해할 수 없는 식생활
마이너리그에선 하루에 12달러를 내고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한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선수들은 음식이 형편없다며 불평을 늘어 놓기 마련이다. 호기심 많은 ‘미스터 초이’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뭘 먹어봤냐고 물은 것. 그 친구들 입에선 ‘랍스터’ ‘스테이크’ ‘칠면조’ 등등 상상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도는 메뉴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때 내가 햄버거를 먹고 있었거든요. 그 맛있던 햄버거가 먹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얘네들은 웃기는 게 아침엔 간단하게 토스트로 해결하고 점심 땐 햄버거, 그리고 저녁엔 피자 몇 조각 먹고 말아요. 난 그렇게 먹으면 허기져서 쓰러져요. 도대체 뭘 먹고 힘을 쓰는지 정말 궁금하더라니깐요.”
# 메이저리그가 보인다
최향남이 미국에 가기까지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대하 드라마’가 존재한다(<일요신문> 708호 참조). 많은 야구인들은 최향남의 미국 도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왠지 모를 답답함과 부담감을 잔뜩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최향남은 이상과 현실의 절대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게임에 뛰지를 못했어요. 감독이 등판을 시켜주지 않는 거예요. 조금씩 자신감이 떨어지더라구요. 이러다가 그냥 보따리 싸들고 귀국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을 생각했어요. 몇몇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뒤로 하고 미국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를요. 생활이 안정되고 게임에 출전하면서 점차 편해지더라구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또 차를 타고 다음 경기 장소로 이동할 때, 난 신께 감사드려요. 아직은 마이너리그지만 이곳에서 몸 담고 생활할 수 있게 해주신 데 대해서 말이죠.”
최향남은 드디어 지난 8일(한국시간) 오타와 링크스(볼티모어 산하)와의 경기에서 감격의 첫 승을 맛봤다. 그동안 10번 중간계투로만 나서며 15.1이닝 동안 승 없이 1패 2홀드를 기록했는데 깜짝 선발의 기회가 찾아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지난 15일, 역시 오타와 원정 경기에서 2승째를 따냈다. 61개의 공 중에서 스트라이크는 42개였다. 4월 30일 이후 6경기(16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 언론에선 최향남을 메이저리그에 승격할 불펜 요원으로 꼽고 있다.
“나랑 같이 뛰었던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는 걸 보면 마음이 콩닥거려요.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지금은 장밋빛이에요. 나에 대한 평가도 좋구요. 근데 올라가는 게 중요한 건 아니더라구요. 가서 어떻게 잘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트리플A에서 뛰는 선수들은 누구나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만한 자격이 있어요. 단 기복이 문제예요. 그래서 멘탈과 컨디션 조절이 아주 중요해요.”
# 하루하루가 여행
미국 생활 중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최향남은 “하루가 여행으로 시작해서 여행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원정경기 갈 때마다 처음 가보는 셈인 최향남으로선 모든 게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이런 생소함이 최향남을 기분 좋게 만든다고 한다.
인터뷰 말미에 돈 얘기가 나왔다. 2주에 한 번씩 주급을 받는 최향남에게 액수를 묻자 스스럼없이 “한 달에 한화로 약 15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방세 내고 용돈 쓰면 20만 원 정도 남는다면서 웃는다. 일 년이면 2000만 원도 채 안 되는 연봉이다. 물론 사이닝 보너스는 제외한 액수다.
“이 나이에 돈 주고 배워야 할 야구를 돈 받고 배우는 건데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내 목표는 메이저리그만은 아니에요. 윈터리그 때는 도미니카나 베네수엘라에 건너가서 공을 던지고 싶어요. 야구할 수 있는 나이가 정해진 ‘시한부 인생’이잖아요. 길게 남지 않은 시간들 알차게 써야죠.”
최향남은 자신의 미국 생활이 힘들고 외롭고 불쌍하게 보이는 걸 끔찍이 싫어했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길이고 그 길에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상한 선입견은 절대 사절한다고 곁들였다.
마무리 인사를 나누다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근데 휴대폰 음성 녹음이 아주 좋던데요. 전화 연결 안 될 때 목소리 뜨는 거 있잖아요. 발음이 아주 좋아요.”
최향남의 대답은 역시 기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거 내가 한 거 아니에요. 구단 직원이 녹음했을 걸요? 에이, 난 아직 문장이 안 된다니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