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월드컵 스위스전에서 부상투혼을 발휘했던 최진철을 만나 경기 당시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6 독일월드컵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스위스전에서 핏빛 투혼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최진철은 아직도 잠자리에 누우면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한국대표팀의 월드컵은 끝났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끈 대표팀과 관련해선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제기되는 등 칭찬과 비난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최진철을 만나 월드컵 취재를 하는 동안 가졌던 궁금증들과 팬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대신 가급적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당연한’ 부탁도 함께 건넸다. 글의 전달성을 높이기 위해 최진철의 대답을 1인칭 화법으로 구성했다.
토고 ‘장난’하나
아무리 곱씹어봐도 토고는 정말 웃겼다. 경기 전부터 수당 문제로 태업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다가 경기 앞두고 감독이 보따리 싸들고 팀을 나가질 않나, 새 감독이 온다고 했다가 다시 보조 코치가 벤치에 앉는다는 등 정말 한마디로 설명이 안 되는 이상한 팀이었다. 경기 당일, 경기장에 나타난 오토 피스터 감독을 보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누굴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뭘 하자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선수들의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외적인 요인 때문에 팀이 망가지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졌을 거란 생각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긴장했고 잘 풀어가려던 의도와 달리 몸놀림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래서 첫 골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경기
예선 세 경기에서 가장 힘들 거라 예상한 경기는 스위스전이었다. 스위스가 워낙 강팀이라고 알려진 데다 한국팀의 자랑거리였던 체력과 조직력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 예상은 적중했다. 스위스는 정말 상대하기가 벅찼다. 차근 차근 풀어가면 어떻게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벤치에선 자꾸 사인을 보냈다.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감독이 롱패스만 지시했다?
감독님이 뭔가 의도하는 바가 있었겠지만 선수들은 운동장 나가서 천천히 뭔가를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님은 볼을 한 번에 길게 연결해서 공격수가 헤딩 싸움한 뒤 떨어지는 볼을 가지고 슈팅하라는 지시를 자주 내렸다. 워낙 이 부분을 강조하시니까 경기 중에 롱패스가 많이 나왔다. 물론 (조)재진이의 헤딩 능력이 워낙 뛰어나 잘만 한다면 감독님의 작전이 맞아떨어질 수도 있었다. 경기 중 선수들끼리 볼을 올리지 말고 밑으로 패스하자는 얘기도 했다. 그러나 벤치에서 계속 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스위스전이 특히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경기는 선수가 풀어간다고?
감독이 어떤 작전을 내렸다고 해도 경기는 선수가 풀어가는 것이라는 부분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욱이 우리도 자신감을 가지고 대회에 임한 터라 감독 말대로 하면 될 것도 같았다. 매번 공을 잡아서 때리기만 했다곤 생각지 않는다.
경기 이틀 전 스리백으로 전환
토고전을 이틀 앞두고 비공개 훈련을 가졌다. 평소 포백 훈련을 했는데 이날은 3-4-3과 4-4-2를 혼용해 훈련했다. 스리백은 워낙 익숙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큰 혼동은 없었다. 물론 실제 경기에서 잠시 헷갈렸고 포지션을 못 찾았던 부분이 있었지만 크게 당황하거나 흔들리진 않았다. 내 입장에선 감독의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말할 수가 없다.
까다로운 앙리
수비수로선 프랑스전의 공격수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이었다. 선수 한 명 한 명을 놓고 보면 굉장히 위협적인 선수들이라 수비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앙리의 돌파는 도저히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슈팅, 드리블, 볼 키핑력, 위치 선정 등 흠이 없는 선수였다. 잠시 방심하고 있다가 놓치면 바로 골을 터뜨리는 선수라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앙리를 상대하면서 (이)영표랑 얘기를 많이 나눴다. 완전한 찬스를 주지 말자면서. 앙리에게 뒷공간을 내줬을 때 어떻게 커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 스위스전에서 부상 투혼을 발휘했던 최진철. 연합뉴스 | ||
그 골을 놓고 골이다 아니다 왈가왈부하는데 같은 팀이었던 선수로서 노 코멘트다. 스위스전의 오프사이드 논란도 마찬가지다. 이미 끝난 얘긴데 지금에 와서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스위스전의 부상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상처가 난 줄도 몰랐다. 내 실수로 골을 먹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까 눈에서 뭐가 떨어지더라. 피였다. 아프지도 않았다. 아플 새도 없었지만. 내 마음은 갈기 갈기 찢어졌다. 그 실점이 패배의 원인이 된 것 같아 두고두고 쓰라렸다. 육체적인 상처보다 정신적인 상처가 훨씬 크게 아팠다. 빨리 잊어야지.
괴로운 단체인터뷰
아드보카트 감독의 특징 중 한 가지가 경기 이틀 전에 단체 인터뷰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색적인 인터뷰 방법이라 꽤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러나 단체 인터뷰가 자주 반복되면서 조금씩 힘들었다. 똑같은 질문에 반복되는 대답이 계속되는 게 싫었다. 특히 월드컵 기간엔 단체 인터뷰 때 말 한마디 못하는 선수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독일에서 행한 단체 인터뷰 때는 처음에 얼굴만 내밀고 곧장 숙소로 도망갔다.
은퇴 후의 계획
일단 대표팀과는 완전히 끝났다. K-리그에 올인할 것이다. 올해까지 뛰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내년까지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 관리만 잘 하면 내년에도 충분히 잘 뛸 자신이 있다. 그러나 안되는데 억지로 선수 생명을 연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동진 이호에 대한 소문들
인터넷 보니까 아드보카트 감독이 러시아에 (김)동진이와 이호를 데려가기 위해 주전으로 뛰게 했다는 글들이 올라와 있더라. 내가 감독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역시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경기 흐름은 선수들보다 벤치에서 더 정확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수를 뛰게 하고 안 하고도 감독의 몫이다.
대표팀에서 또 오라고 하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대회도 홍명보 코치의 설득을 받고 어렵게 결정해서 들어간 것이다. 이젠 후배들이 내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확한 건 2010년까지는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계획하고 있다. 유럽 쪽에서 연수받으며 가급적 오랫동안 공부만 하고 싶다.
아들은 지성이를 좋아해
월드컵을 앞두고 아들 녀석의 반 친구들이 태극전사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썼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 아들에게 물어봤다. 누구한테 편지 썼냐구? 그 녀석 왈, (박)지성이 삼촌한테 썼다고 하더라. 와~ 마구 질투가 났다. 정말 서운했다. 그래서 지성이한테 괜시리 화풀이했다. 왜 내 아들이 아빠가 아닌 너에게 편지를 써야 하느냐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유럽에서 치른 월드컵은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자 배움의 무대였다. 내 실력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실히 느낀 시간들이었다. 가슴에 품고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월드컵은 지난 일이 돼 버렸다. 아직도 결승까진 시간이 남았지만 말이다. 아쉬움, 후회, 미련 이런 거 모두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대표팀 최진철이 아닌 전북 현대의 수비수 최진철로 말이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