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한 후 2년 만에 컵대회 우승을 일군 이장수 감독. 낯선 중국 땅에서 최고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2006 삼성 하우젠컵 우승으로 ‘충칭의 별’에서 ‘서울의 별’로 자리매김한 FC 서울의 이장수 감독. 어느 감독들보다도 ‘사연이 많은’ 그였기에 이번 우승이 주는 감격과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더욱이 주전들이 아닌 2군에서 뛰었던 한동원 천제훈 심우연 이상협 등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값진 의미를 선사했다.
이 감독은 중국 프로무대에서 6년간 지도자 생활을 하며 이름을 날리다가 귀국, 전남 드래곤즈의 사령탑으로 부임했지만 구단과의 마찰로 결국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FC 서울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한 첫 해, 일부 팬들의 퇴진 요구를 듣는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마이 웨이’걸어온 한 결과 2년 만에 컵 대회 우승이라는 짜릿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우승 다음날인 7월 27일 구리 챔피언스파크의 감독실에서 만난 이 감독은 오랜만에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이했다.
그동안 이 감독과 몇 차례 인터뷰를 했지만 이번처럼 ‘좋은 주제’로 인터뷰를 한 건 처음이다. 중국에서 국내 복귀 후 전남 팀을 맡으면서 구단과 ‘이장수’ 라는 이름을 걸고 싸웠던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심경 토로’니 ‘직격 인터뷰’니 하는 다소 ‘쎈’ 타이틀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
남다른 인연을 내세우며 이 감독과 리얼 토크를 시작해 봤다.
―어제 우승한 뒤 헹가래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나요.
▲성남 일화 시절 코치 신분으로 세 차례 정도 있었던 것 같고 96년인가요? 아시아 아프리카 클럽 챔피언들끼리 맞붙은 친선 경기에서 감독 맡고 처음으로 우승한 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두 번 있었고 이번에 받았으니까 7번 정도 되네. 많은 건가요?
―어휴, 그 정도면 우수한 거죠. 헹가래 한 번 못 받는 감독들도 있어요.
▲그런 점에선 행복해요. (우승)하기까지가 힘들지 하고 나면 정말 보람이 있어요. 이 맛에 우승하려고 하나 봐요. 감독이란 자리가 힘들긴 해도 직업적인 매력이 있어요. 안주할 수 없게 만들거든요. 이번에 우승했다고 영원히 칭찬 받는 건 아니잖아요. 후기리그에 성적이 안 좋으면 또 다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구요. 그래서 재밌어요.
―지난해 FC 서울을 맡은 뒤 팀 성적 부진으로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 같아요.
▲물론 힘들었죠. 팀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받아들였어요. 서울 팀이라 관심 갖는 사람들도, 보는 ‘눈’들도, 또 애착을 갖는 사람들 많다는 걸 인정했죠. 좋은 성적만이 유일한 대응 방법이었습니다.
▲ 2006 삼성 하우젠컵 우승 후 짜릿한 헹가래. 이장수 감독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또 ‘우승’이란다. 사진제공=FC 서울 | ||
―혹시 지난해 위기감을 느꼈나요? 성적이 올라가지 않으면 그냥 물러날 수도 있다는 그런 위기감이요.
▲전 잘리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요. 이미 두 번이나 잘려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런 건 걱정이 안 되더라구요. 왜 이런 말 있잖아요. 성적이 좋을 때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전봇대에다 오줌을 싸도 이해를 받지만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양복을 단정히 입고 조심스럽게 거리를 걸어가도 그 자체를 가지고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어요. 프로의 생리가 성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죠. 계약 기간에 얽매여서 눈치 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만약 제 자리가 눈칫밥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면 제가 알아서 그만뒀을 거예요.
이 감독이 ‘두 번 잘렸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성남 일화에서 코치에서 감독으로 부임 후 팀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과 전남 드래곤즈의 사령탑을 맡아 첫 해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등 좋은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의 마찰로 물러났던 ‘사연’들이다. 처음 잘릴 때가 가장 통증이 컸고 그 다음에는 그 세기가 약했다고 회상한다.
―감독들의 또 다른 고충이라면 축구에만 전념할 수 없게 만드는 ‘문화’인 것 같아요. 감독에게 여러 역할을 기대하는 게 현실인데 어떠세요?
▲많이 부대꼈죠. 축구 감독이 축구 외적인 일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하니까. 제 스타일이 처신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에요. 좀 딱딱하죠. 그런 부분들이 구단 측이나 팬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FC 서울의 구단주는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세요. 어떤 팀의 구단주는 축구의 룰은 물론 선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거든요. FC 서울은 그런 점에서 좋은 여건이 주어진 거죠.
―박주영 얘기 좀 해볼게요. 박주영 입단 후 FC 서울의 언론 노출 빈도가 엄청나게 상승됐어요. 그런 부분이 감독 입장에선 득이 될 수도, 또는 해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제가 정했던 그림으로 팀을 이끌어갔죠. 물론 박주영이란 선수가 뉴스메이커이기 때문에 제가 말한 부분들 중에서 주영이와 관련된 내용만 발췌돼 기사화된 적은 많아요. 안타까운 건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엔 언론의 칭찬과 비난이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사실이에요. 다른 선수가 한 골 넣는 것과 주영이가 한 골 넣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로 기사화되는 현실 속에서 선수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결론은 모든 걸 자신이 감당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거죠. 월드컵 이후 힘들었을 텐데 지금은 잘 극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박주영(왼쪽), 백지훈 | ||
▲구단 대 구단 간의 트레이드가 성사된 후 선수가 알았다면 분명 서운했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좋은 선수가 빠져 나가면 감독이 아쉽죠. 그러나 구단이 살아야 지도자도 선수도 사는 거잖아요. 설사 서운한 감정이 있다고 해도 받아들여야 해요. 정말 선수를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생각해 봐야죠.
―혹시 백지훈의 트레이드에 감독의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됐나요? 어느 기사를 보니까 감독과 선수가 불편한 관계였다고 썼던데.
▲지훈이는 제가 전남에 있을 때 발굴한 선수였고 우연히도 FC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제가 선수에 대해 개인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선수가 나가면 제가 아쉬워요. 한 명이라도 더 좋은 선수를 데리고 있고 싶은 게 당연하죠.
―프로야구의 선동열 감독은 언론을 통해 평소 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스타일로 유명해요. 이 감독도 그런 적이 있나요?
▲지금까진 그런 적이 없어요. 아! 그런데 이 말은 언론을 통해 하고 싶었어요. 요즘 선수들 연봉이 무척 높아요. 우리나라의 축구 시장에선 높은 편이에요. 수익 구조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구단은 그걸 맞춰줘야 하거든요.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봉을 높이기 전에 먼저 실력부터 쌓았으면 해요. 실력이 연봉에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수원 삼성과 라이벌팀으로 부각되곤 하는데 수원전에는 더 신경이 쓰이나요?
▲저보다 기자들이 더 신경 쓰는 것 같던데?(웃음) 수원전이 있을 때는 언론에서 며칠 전부터 더비전이니 라이벌전이니 하면서 관심을 모아줘요. 그래서 제가 선수들에게 특별히 뭐라고 하기 전에 언론에서 알아서 긴장을 조성시켜주니까 고맙죠. 물론 수원전이 다른 경기보다 부담되는 건 사실이에요. 승패의 결과에 따른 후유증이 좀 크거든요. 하하.
―차범근 감독과 사석에서 따로 만난 적이 있나요? 중국에서 프로팀 감독도 같이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런 적이 없었네. 경기장에서 만나는 것 외엔 따로 보지 못했어요.
―컵 대회 우승도 중요하지만 후기리그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것도 새로운 목표일 것 같아요.
▲우승은 자꾸 하고 싶어요. 14개 구단 모든 감독들이 똑같은 생각일 거예요. 컵 대회에서 우승도 했으니까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밀고 가야죠.
인터뷰를 하는데 계속 휴대폰이 울려댔다. 대부분 축하 전화였다. 전화를 ‘대충’ 받고 끊으면서 이 감독이 미안했는지 “빚쟁이들이 돈 갚으라고 성화”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우승 후 친한 친구가 전화를 해선 ‘이젠 ‘충칭의 별’에서 ‘서울의 별’이 되는 거냐’고 말하길래 ‘서울의 별은 맞는데 서울의 썩은 별’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한참을 웃었다.
이장수 감독은 그리 부드러운 인상이 아닌 데다 얼굴까지 ‘블랙 톤’이라 말 안 하고 조용히 있으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스타일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내뱉는 멘트 하나 하나가 ‘이장수 어록’에 기록될 만큼 재치와 재미가 넘쳐난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사진 기자가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자 사진 나오면 검은 얼굴 그대로 쓰지 말고 포토샵으로 하얗게 칠해 달라는 부탁도 건넨다. 우승이 가져다준 ‘잠시 동안’의 여유가 감독실을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