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중앙대 시절부터 얼굴을 봐 왔고 간간이 전화 인터뷰도 했었지만 이번처럼 코트 밖에서, 그것도 소주잔을 앞에 두고 인터뷰를 한 건 처음이었다. 생애 가장 가슴 떨렸던 순간이었다고 기억하는 은퇴식을 치르고 이틀 뒤 서울에서 기자와 만난 김영만은 의외로 달변가였고 ‘허-동-만 트리오’답지 않게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가수 신지와 함께 운영한다는 여의도의 고깃집 ‘신성’에서 ‘기아 왕조’의 ‘마지막 적자’였던 김영만과 취중 토크를 벌였다.
● 왕년의 ‘허동만 트리오’
“술은 허재 형 따라갈 수가 없죠. 연타(매일 술 마시는 것)엔 당해 낼 자가 없어요. 저도 원래 술을 못했는데 허재 형, (강)동희 형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부터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어요.”
KCC 감독과 원주 동부 코치로 있는 허재 감독과 강동희 코치를 ‘형’으로 호칭하는 김영만은 술자리 인터뷰라서 그런지 자연스레 술에 얽힌 에피소드부터 끄집어냈다. 허재 감독이 두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다는 일화를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자랑삼아 얘기하면서 한마디 툭 던진다.
“그때(기아 시절)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정말 운동을 즐기면서 했거든요. 형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김영만은 실업팀 기아의 그 유명한 ‘허-동-택 트리오’에서 ‘허-동-만 트리오’라는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었다. 체력적인 문제로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진 김유택을 대신해 김영만이 투입되면서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삼총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고3(마산고) 때였나? 안성 중앙대 체육관에서 중앙고랑 게임을 하는데 허재 형이 체육관을 찾아왔더라구요. 절 보러 일부러 오신 거였어요. 제가 고교 농구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하니까 중앙대 정봉섭 부장님이 허재 형에게 김영만 좀 보고 오라고 부탁하셨대요. 처음으로 허재 형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어요. TV에 나오는 사람을 직접 보니까 실감이 안 나고 너무 흥분이 되더라구요. 몸도 예술이고 키도 크고, 마치 연예인 보는 것처럼 신기했어요.”
● 중앙대 선택한 사연
김영만을 데려가려는 대학팀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고 한다. 당연히 연·고대에서 먼저 손을 뻗쳐 왔다. 김영만은 내심 연세대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고려대의 ‘러브콜’에 아버지가 사인을 하는 바람에 단념해야만 했다. 그런데 막판에 중앙대에서 치고 들어왔다. 정봉섭 부장이 중앙대로 오면 동료 선수 세 명을 함께 받아주겠다는 엄청난 제안을 했다. 김영만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센터에서 포워드로 포지션을 바꾸고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려면 중앙대를 선택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게 됐다.
▲ ‘허동만 트리오’의 막내가 코트에서 퇴장하는 날. 지난 13일 전주 KCC와 원주 동부와의 경기에서 김영만이 마지막 게임에 임하고 있다. 사진제공=전주 KCC | ||
그러나 입학 초기에는 너무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무지 애를 먹었다. 특히 규모가 낡고 작은 체육관에서 훈련하던 습관(고등학교 체육관 천장이 낮아 조명이 공에 맞아 깨지기 일쑤였고 사이드라인이 벽에 바짝 붙어 있어 패스도 멀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슛 거리가 짧았고 패스 감각도 흐트러지고 말았다. 대학 체육관에 적응하는 데 2년여의 시간이 걸렸을 정도니 김영만이 학창시절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운동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도망갈 생각을 못했죠. 부모님 생각하면 감히 일탈을 꿈꿀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은퇴식 때 꽃다발을 주시며 절 꼭 안아주시는데 가슴이 뭉클하더라구요.”
● 아쉬움 남긴 은퇴식
김영만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은퇴 시기를 저울질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은퇴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해오다 초라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게 싫어서 1년씩 더 ‘생명 연장’을 했던 게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
“좋은 모습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창원 LG에 있다가 2006년에 원주 동부로 옮겼죠. 동부라면 김주성이 있으니까 우승도 욕심을 낼 만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너무 체력이 달리는 거예요. 98년 무릎 부상 이후 끊임없이 잔부상에 시달려 온 게 후유증으로 나타난 거죠. 그런 거 아세요? 마음은 저 앞에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거…. 결국 올 초 허재 형이 있는 KCC로 또 옮겼는데 KCC 코트에 모습을 보인 게 은퇴식이 있었던 날 1분 31초를 뛴 모습이 전부였어요.”
이적 후 전혀 기여한 게 없는 KCC에서 은퇴식을 마련해 준 데 대해 김영만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더욱이 은퇴식이 묘하게 ‘허-동-만 트리오’가 다 모일 수 있는 KCC와 원주 동부와의 경기라 농구팬들의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다.
“담담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은퇴식 당일 새벽 서너 시 정도 되니까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긴장이란 걸 몰랐는데 막상 은퇴식이 시작되니까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은퇴지만 시즌 중에 많은 분들 앞에서 박수받으며 코트를 나올 수 있어 그래도 전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김영만은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농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유는 한 가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타고난 성실함을 바탕으로 단체 훈련 외에도 지독하다고 할 만큼 개인 훈련을 해왔던 그는 개인 훈련을 너무 ‘오버’하는 바람에 부상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루에 슈팅 연습을 1000개 이상 해야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다.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요. 10연패를 하니까 머리카락이 점점 더 빠지더라구요. 항상 후배들을 끔찍이 챙기고 유쾌하게 살던 형이었는데 한동안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형이 이런 말을 했어요. 농구하면서 이렇게 많이 져본 건 살다 살다 처음이라고. 경기 중에 양복 벗어 던지고 뛰어 들어가서 같이 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해요.”
KCC에서 감독과 선수로 다시 만난 허재와 김영만. 허재 감독은 데뷔 첫 해 팀을 4강에까지 올리며 스타 감독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올 시즌은 하루하루가 수렁에 빠진 나날들이었다.
“지도자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옆에서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허재 하면 여느 농구 선수 출신과는 다르잖아요. ‘농구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인데. 허재 형이 성적 부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까 지도자 되는 게 덜컥 겁이 나더라구요. 그래도 형은 잘 이겨낼 거예요. 허재이기 때문에 분명히 잘 해 낼 거라 믿어요.”
● 소문난 알부자
김영만은 선수 시절 두 차례의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어 꽤 두둑한 목돈을 챙겼다. 물론 지난해 두 번째 FA 때는 소속팀 LG와의 협상이 결렬돼 동부 유니폼을 입으면서 첫 번째 FA 때처럼 수익을 내지 못했지만 IMF 시절 재테크에 성공해 알짜 부자로 소문나 있다.
“누나가 은행에 다니는 덕분에 일찍 재테크에 눈을 뜰 수 있었어요. 프로만 11년 차인데 은퇴 후 손에 쥐고 있는 게 없으면 너무 허무하겠죠. 먹고 살 만큼 모아놨어요. 제가 한때 연봉이 2억 7000만 원까지 올랐었거든요. 그러다 해마다 깎였고 은퇴 전에는 1억 원이 제 몸값이었습니다. 1억에서 더 내려갔다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수입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죠.”
소주를 딱 두 잔만 마시겠다고 선언한 김영만은 약속대로 두 잔만 마시고 더 이상 잔을 들지 않았다. 그런데 김영만은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요!’를 외친다. 벌써 세 병째다. 누가 다 마셨을까. 취재진들이 주범이다.
농구 선수들이 대부분 키를 올리는 데 반해 서장훈만 키를 낮춰 적어낸다는 얘기부터 대표팀 시절 ‘오빠부대’들이 이상민, 우지원에게 달려들어 사인 공세를 퍼부을 때 자신은 남성팬들로부터 사인 요청을 받았다는 스토리, 그리고 지난해 결혼한 아내의 이름이 농구 선수 조성원과 같아서 ‘김영만이 조성원과 결혼한다’며 놀림을 받았던 일화 등등 에피소드들이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다음주부터 중앙대 코치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돼요. 프로팀이 아닌 대학 팀이라 오히려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사마귀 슈터’가 지도자로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지 지켜봐 주세요. 참, 그런데 전 ‘사마귀 슈터’란 별명이 너무 싫었어요. 다른 선수한테는 ‘코트의 황태자’ ‘산소 같은 남자’ ‘컴퓨터 가드’란 멋진 별명이 붙는데 왜 저한테만 유독 ‘사마귀 슈터’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어요. 저, 사마귀 너무 싫어해요. 하하”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