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전 지사는 지난 7일 경북 상주의 옥수수병조림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옥수수껍질 까는 일로 이날 일정을 시작했다(오른쪽위), 오른쪽 아래는 옥수수병조림 기계 앞에서 작업하는 손 전 지사. 왼쪽 큰 사진은 이후 일정으로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는 손 전 지사. | ||
하지만 흰 얼굴이 뙤약볕에 그을려 시골 농부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카메라가 돌아가든 말든 능숙한 인부 한 명의 몫을 해내느라 땀을 흘리자 조금씩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8월 7일 100일 민심대장정의 39번째 날, 경북 상주에서 그의 대장정 하루 일정을 취재했다.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의 등장은 좀 뜻밖이었다. 까만색 차량 행렬을 기대한 기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택시 한 대였기 때문이다. 100일 민심대장정 첫째 원칙이 대중교통 이용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시골에는 버스나 기차 등이 많지 않아 길바닥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기는 하지만 승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되기 때문에 원칙을 지켜나간다고 한다. 택시를 탈 때는 운전기사 옆 좌석에 앉아 ‘구전의 정거장’인 택시기사들로부터 가감 없는 민심의 소리를 듣는다.
손 전 지사는 11시 30분쯤 경북 상주시 공검면에 있는 친 환경 먹거리 업체 토리식품에 도착했다. 학생용 배낭을 메고 택시에서 내린 그의 모습은 기자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은 새카맣게 그을렸고 수염은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흰머리가 수북한 머리카락도 빗질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일거리를 찾아 나선 일용 노동자의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사실 100일 민심대장정은 제방 쌓기, 채탄작업, 각종 농삿일 등 고된 작업의 연속이기 때문에 내년 예순(1947년생)을 맞이하는 손 전 지사에게는 벅찬 일정이다. “힘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괜찮다. 할 만하다”고 하면서도 “수해 복구 작업 때의 제방 쌓기나 뜨거운 열 때문에 고생했던 한지제조 작업 등은 좀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날 손 전 지사는 옥수수병조림에 들어갈 옥수수의 껍질을 까는 것으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 일을 하던 아주머니들 틈에 섞여들면서 “밖에서 농삿일하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앉아서 노는 것이다”라며 옥수수를 집어 든다.
▲ 수첩이 대권 밑천 공검면 주민들과 양푼비빔밥으로 점식식사를 마친 뒤 그들의 발언을 꼼꼼히 정리하는 손학규 전 지사(위), 아래는 사과 과수원에서 일을 끝낸 뒤 주민들과 함께 막걸리를 나누고 있는 손 전 지사. | ||
옥수수 껍질 까기 작업과 친 환경 농산물 생산 작업을 도운 후 주민들과의 간담회가 이어졌다. FTA 개방 문제가 최대의 화두였다. 이 자리에서 한 주민은 “FTA 협상이 체결되면 한국 농민은 10개를 얻고 100개를 미국에 내주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장기적 계획을 마련해놓고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소리’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던 손 전 지사. 그는 “내가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FTA 개방은 반대한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FTA 개방이 된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어떤 대비책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간담회를 주도해나갔다.
손 전 지사는 간담회 내내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모든 내용을 기록해나갔다. 그는 자신의 수첩에 대해 “거기에 쓴 것과 일기에 기록된 내용 등을 모두 정리해 데이터베이스화 할 것이다. 그것이 향후 정책개발의 핵심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간담회 후 그가 찾은 곳은 율곡마을에 있는 예지농장이라는 한 과수원. 그에게는 올해 첫 수확되는 사과 따기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 따기도 광산에서의 채탄작업 때처럼 그의 학생 운동 경력과 인연이 있었다. 그는 “30여 년 전 학생운동을 하다 도망을 다닐 때 원주의 한 과수원에서 6개월 정도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 사과 따기도 신물나게 했던 노동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상한다.
손 전 지사는 한 팔에 무거운 사과 바구니를 들고 조심스럽게 사과를 따나간다. 이날 상주는 35℃를 육박하는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 더위지만 손 전 지사는 그 동안 더위와 노동에 익숙해진 듯했다. 벌레 먹은 사과를 발견하자 한 입 툭 베어 문다. 기자에게도 “맛을 보라”고 권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 지난 6월 30일 퇴임 직후 수원역에서 민심대장정을 떠나는 손학규 전 지사. 40일 가까이 지난 지금의 텁수룩한 모습과 비교된다. 연합뉴스 | ||
사과 따기 작업을 마치고 다시 공검면 동막리의 노인회, 청년회 공동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선 현 정권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줄을 이었다. “한국 정치는 당파싸움밖에 안 한다” “우리도 비료 살 돈이 없는데 북한에 왜 공짜 비료를 주느냐” “노무현 대통령은 중심이 없다” “국회의원 숫자가 너무 많다” “농촌지역의 파출소 우체국 등의 통합으로 불편한 점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간담회를 마친 뒤 해가 서편으로 기울었지만 아직 그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주시 공성면 거창리에 있는 혜성목장을 방문했다. 손 전 지사는 마지막 일정으로 이곳을 방문했지만 저녁 8시에 도착했기 때문에 주민들과 즉석 간담회밖에 가질 수 없었다. 이때 주인이 직접 마련한 고급 한우고기도 나왔다. 손 전 지사는 “집 나와서 최고로 좋은 대우를 받은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혜성목장 주인 장경륜 씨는 84년에 송아지 세 마리로 출발해 20여 년 만에 한우 800마리를 기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손 전 지사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일일이 수첩에 기록하며 성공담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현재의 농촌이 어떻게 생존의 길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이날 마지막 간담회는 밤 11시를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이 날도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손 전 지사는 틈틈이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정치적 발언은 자제했지만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킹 메이커론에 대해 질문하자 “김 의장과는 대학(서울대) 때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인연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졌던 열정이 변한 건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 차원에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항상 같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김 의장과의 연대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손 전 지사는 다음 날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일기 쓰는 일을 시작으로 민심대장정 40일째를 바쁘게 맞이했다. 손학규 식 ‘체험 삶의 현장’이 끝나는 날, 국민들은 과연 그를 어떻게 평가해줄지 궁금해진다.
경북 상주=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