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은 과연 누구를 염두에 두고 ‘외부선장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일까. 대통령의 입에서 정계개편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외부선장론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청와대의 머릿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노 대통령이 점찍어 둔 ‘왕의 적자’는 과연 누가 될지 몇 개의 기준을 토대로 찾아 나서 본다.
“한국 역대 대통령을 보면 차기 대권 후보를 위해 자신들의 레임덕을 감수하면서까지 많은 배려를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를 키워주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후보로부터 내각제 문서 공개 파동의 수모를 당하면서도 결국 김 후보를 지켜주었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꼴을 결코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정치적 아들’인 이인제 후보가 끝까지 선거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이 부분은 전직 대통령은 차기 대권 후보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예외적 경우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무현 후보를 전격 발굴해 정권의 연장성을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전통은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권의 차기 후보 선정에 직접 관여할 가능성이 크고, 자신을 밟고 다시 한번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또한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뒷방 늙은이로 전락할 경우에도 여권의 후보가 대권을 차지할 수 없도록 할 힘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그의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 전직 의원 A 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인제 후보를 끝까지 대선에 남게 해 이회창 후보를 낙선케 했던 예를 통해 보듯이 노 대통령이 아무리 ‘식물 대통령’이란 비아냥을 듣더라도 ‘누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을 정도의 포스는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노 대통령은 이미 흉중에 차기 대권 후보를 품어 놓고 ‘왕의 적자’를 위해 ‘꽃길’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노 대통령을 잘 알고 있는 열린우리당 수석전문위원 B 씨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그는 “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모든 고정관념을 갈아엎어 버렸다. 검사가 예전의 검사가 아니고 국회의원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현재 지지율은 떨어지고 있지만 역사와의 대화를 통해 일부 계층의 기득권을 모조리 바꾸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기 정권은 더 이상 갈아엎어서는 곤란하다. 이제는 갈아엎은 곳에서 돌멩이를 골라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통합의 리더십이다. 노 대통령이 갈아엎은 놓은 밭을 다시 일구어 화해의 정치로 이끌 정치인이 차기 대권을 창출할 시대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 왼쪽부터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총장, 박원순 변호사, 강금실 전 장관, 유시민 장관. | ||
두 번째 덕목은 신선함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정권 막판까지 비교적 ‘조용히’ 지내다가 대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실시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바람을 탔던 전력이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론을 통해 가장 ‘때’가 덜 묻은 인사를 고르려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의원은 “국민들은 현재의 정치권에 대해 신물이 날 정도로 불신하고 있다. 지난 5·31 지방선거는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이 표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을 포함한 정치권 전반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쯤 되면 현재의 유력 대권 주자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빅3(이명박 박근혜 고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도 없어질지 모른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뉴 페이스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정세균 김혁규 강금실 진대제 씨 등이 새 인물의 기준에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외부 인사들도 여기에 적합하다.
세 번째는 개혁성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과 일을 같이할 장관을 임명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로 ‘코드’를 꼽은 적이 있다. 자신과 개혁성향이 비슷한 인물을 국정 운영의 최적임자로 뽑을 게 분명하다. 이 요소에 합당한 인물로는 유시민 장관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강금실 장관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도 개혁 기준에 적합한 ‘잠룡’들이다.
이런 필요조건 외에 정치공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왕의 적자’를 유추해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의 당·청 오찬 간담회에서 오픈 프라이머리(개방형 국민경선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뒤를 이어 친노 직계그룹인 백원우 의원 등은 최근 오픈 프라이머리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인 공론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기존 당원들의 기득권을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전혀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한 셈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외부 인사들까지 조건 없이 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해 ‘후보 풀’을 최대한 넓히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도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완전 국민경선제는 정운찬 전 총장이나 박원순 변호사 등 당내 입지가 전혀 없는 ‘신인’들에게 유리한 제도다.
앞서의 민주당 전 의원 A 씨는 국정원 등 정보기관 사람들과도 잦은 모임을 갖는 것으로 전해진다. A 씨에 따르면 “국정원은 내부적으로 수 십 개의 정계개편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연구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한 인사로부터 ‘노 대통령은 현재 공개적으로 드러난 여권의 대선 후보들에게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차기 대선 후보는 밋밋한 사람이 아닌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카드가 될 수 있는 정운찬 전 총장 같은 인사들까지도 차기 유력한 대권 후보군에 포함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이 최근 공개적으로 제기한 오픈 프라이머리는 차기 대권 후보의 정체를 더욱 확실하게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 정권을 이끌어나갈 후보인 ‘왕의 적자’는 앞으로도 노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그 윤곽이 요동칠 것으로 전망된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