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60여 년간 이어져 온 공동체가 수년 전부터 조금씩 와해되는 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사실상 해체됐다. 그러면서 무려 40여 년간 공동체에서 지내온 한 남성은 무일푼으로 오갈 곳이 없게 됐다. 비록 공동체는 해체됐지만 고 원경선 원장의 유가족은 그 남성에 대해 “끝까지 책임질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양측 사이에는 다른 말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이제는 ‘과거’가 돼 가고 있는 ‘풀무원 공동체’를 들여다본다.
김 씨는 40여 년 간 ‘공동체’와 함께했다.
“무일푼으로 나가지만 40년 동안 행복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아직 전후 복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1955년, 고 원경선 원장은 경기도 부천에 땅 1만 평을 개간해 ‘풀무원농장’을 만들었다. 그런 뒤 오갈 곳 없는 전쟁 고아나 부랑아를 모아 ‘공동체’를 설립했다. 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풀무원농장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부천이 도시화되면서 1976년 경기도 양주로 농장을 옮긴 뒤 화학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농사를 시작했다. 양주 농장을 옮기면서부터 고인은 늘 “이 세상이 망가지는 이유는 ‘가족 이기주의’ 때문이다. 이것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4년 농장을 충북 괴산으로 옮겨 ‘생명 존중’과 ‘이웃 사랑’ 가치를 구현하며 공동체를 지속했다.
공동체 강령은 ‘모든 일에 성실을 기본자세로 하고 적은 일에서부터 이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부정하고 솔직하고 정직한 행동을 갖는다’ 등으로 기독교 정신에 기반했다.
고 원 원장은 당시 ‘풀무원’ 고문으로 있으면서 매달 고문료를 받았는데 그 돈 역시 공동체를 위해 전액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공동체에는 늘 ‘자립’을 외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공동체는 고인의 애초 설립 취지와 다르게 변해가면서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공동체 관계자들에 따르면 양주 공동체에서 총무를 맡은 중간 관리자가 법인을 세워 수익사업을 시작한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공동체 일원 가운데 몇 명은 사업을 위해 보증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농장을 괴산으로 옮긴 뒤에도 잡음이 있었다.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고령이었던 고인이 공동체 농장에서 나오게 되면서 빠르게 해체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2012년 고 원 원장이 작고한 뒤로 공동체가 있던 농장 토지는 고인의 딸인 원 아무개 씨가 ‘풀무원’으로부터 매입했다. 하지만 원 씨는 경제적인 사정으로 농장 토지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에 공동체에 남아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2016년 말까지 농장을 떠나 달라고 통보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왔다가 떠났다. 김영진 씨(59)는 무려 40여 년을 공동체와 함께했다. 대부분의 공동체 일원들은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에 들어와 수개월에서 수년 정도를 지낸 뒤 떠났다. 그렇지만 김 씨만큼은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키며 그 인연을 함께해왔다.
김 씨는 공식적으로 장애 판정을 받진 않았지만 경계성 지적 장애가 있다. 김 씨는 1974년 원 선생의 손을 잡고 부천 농장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김 씨는 40여 년간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오전 근로, 1시부터 5시까지 오후 근로를 했다. 김 씨는 “계절 농사도 짓고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면서 공동체 농장 생활을 추억했다. 이어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 용돈으로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해체 수순에 돌입하면서 2012년 이후에는 농장에 김 씨와 A 씨 가족만 남아 생활했다. 그리고 결국 지난 2월 김 씨도 경기도 일산에서 살고 있는 딸과 함께 살기 위해 공동체를 나왔다.
생전 원 원장은 김 씨를 가족같이 생각하며 김 씨의 후일을 걱정했다고 한다. 고인의 딸은 “아버지가 생전 김 씨 걱정을 많이 했다”면서 “우리 또한 40여 년간 함께해 온 김 씨를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 씨의 오빠인 더불어민주당 원혜영 의원도 평소 “김 씨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원 씨는 현재 있는 농장을 정리해 1억을 김 씨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원 씨는 “도의적 책임으로 1억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1974년 부천 공동체부터 생활을 함께했다.
다만 시기를 두고 분쟁이 일고 있다. 김 씨는 당장 1억 원을 달라는 입장인 데 반해 원 씨는 김 씨에게 당장 주지는 않겠다는 입장이다. 원 씨는 “1억 원은 김 씨의 노후 자금이나 마찬가지다. 장애가 있는 김 씨가 혹시 ‘엉뚱한 곳’에 쓸 염려가 있다”며 걱정했다. 이어 “김 씨가 몸이 아파 요양병원에 가게 될 때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씨는 당장 힘들다며 1억을 받길 원하고 있다.
노무법인 다현의 김형준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업무의 내용, 근무시간, 근무 장소가 지정되고 업무수행 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는지 등을 기준으로 판단된다”며 “김 씨의 경우 실질적으로 근로자성이 인정된다고 보여지므로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작은 좋은 취지였으나 현행법 상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관련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공동체’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김 씨는 농장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온 지난 40여 년을 어떻게 회상할까. 김 씨는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다시 공동체가 복원돼 농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여전히 큰 애착을 갖고 있다.
이제 그 공동체는 해체됐다. 비록 당장은 1억 원의 지급 시기를 두고 잠시 다른 입장을 보이긴 했지만 40여 년간 가족과 같았던 김 씨를 “책임지겠다”는 원 씨 일가의 말이 꼭 지켜지길 기대해본다. 그것이 ‘유종의 미’가 아닐까.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