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고 갈 김경문 감독(오른쪽)과 선동열 수석코치. 8개 구단 사령탑 중 가장 친밀도가 높아 상호의견이 보완되면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본격적으로 예선전 준비에 돌입한 한국 야구대표팀의 현 상황과 문제점 등을 파악해본다.
▶▶ 이름값 대신 ‘실속’ 챙겼다
4강 신화를 일궈낸 지난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와 비교하면 이번 대표팀은 국내파 선수들이 주축이 돼 있다. 코나미컵이 끝난 뒤 합류할 이병규(주니치)를 제외하면 현 대표팀 31명의 최종 예비 엔트리에서 순수 해외파는 둘 뿐이다. 박찬호(LA 다저스 초청선수)와 류제국(탬파베이 산하 AAA)이 주인공. 그러나 박찬호와 류제국 모두 대표팀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찬호는 전성기 구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올시즌 중반에도 “나의 전설은 끝났다”면서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걸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선발로 한 경기에 나설 것이란 예측이 있지만 마땅치 않다. 류제국도 그간 잠실구장에서 치러진 대표팀 연습경기 때 그다지 빼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심지어 류제국의 경우엔 대표팀 최종 엔트리인 24명 안에 포함되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일본전 선발 등판이 유력한 왼손투수 류현진(한화), 4번 타순을 맡을 3루수 김동주(두산), 유격수 박진만(삼성), 1루수 이대호(롯데) 등 순수 국내파 선수들의 활약에 모든 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BC 때 태극마크를 달았던 선수 가운데 이승엽(요미우리), 서재응(탬파베이 산하 AAA), 김병현(FA), 구대성(한화궡營?뉴욕 메츠) 등 굵직한 해외파가 모두 전력에서 빠져 있는 상태다. 이승엽은 10월 말 왼손 엄지 수술을 받았고, 서재응과 김병현은 본인이 대표팀 합류를 고사했다. 구대성도 최종 예비 엔트리에는 포함됐다가 수술을 이유로 제외됐다. WBC에서 타율 3할3푼3리, 5홈런, 10타점으로 홈런왕에 오른 이승엽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WBC 4강 등 역대 드림팀이 해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마다 항상 이승엽이란 존재가 있었다. 대표팀이 티켓을 따낸다면 이승엽도 내년 8월 본선에 합류하겠지만 현재로선 그 없이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 지 염려된다.
대만은 전통적으로 변화구에 약하다. 그래서 김병현이 대만전 선발로 낙점돼 있는 상태였지만 훈련 부족과 자유계약선수 신분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을 이유로 들어 대표팀 선발을 고사했다. 마운드 전력이 많이 약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박찬호가 대만전에 선발 등판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는 김병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표팀이 터무니없이 허약해진 건 아니다. WBC 때 선수 선발 기준은 철저하게 이름값 위주였다. 반면 이번 대표팀은 이름값은 떨어져도 실속을 많이 따졌다. 포스트시즌에서 두산의 빠른 야구를 대표했던 이종욱과 고영민, 투타에서 모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이택근(현대)과 정근우(SK), 왼손 스페셜리스트인 투수 송진우(한화), 권 혁, 전병호(이상 삼성), 류택현(LG) 등이 포함돼 있다. 딱 한 팀만을 타깃으로 삼아 투입할 수 있는 물량전에서는 결코 WBC 때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기대를 가져봄직하다.
▲ 박찬호 | ||
대표팀 김경문 감독은 공주고 후배인 박찬호에게 주장 완장을 차게 했다. 박찬호로선 생애 처음으로 주장을 맡게 됐다. 야구팀에서 주장이란 자리는 임무가 막중하다. 본인도 실력을 보여줘야 하지만 서로 겉도는 선수들을 한데 모아서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알고 있는 박찬호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며 정중하게 고사의 뜻을 전했지만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그에게 결국 중책을 맡겼다. 박찬호는 “WBC 때 이종범 선배의 100분의 1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자리를 받아들였다.
WBC 때 주장은 이종범(KIA)이었다. 이종범은 당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일본과의 8강 2라운드 경기 때 한신의 괴물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결승 2루타를 터뜨리면서 수훈 선수가 됐고, 주장으로서도 팀 분위기 화합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선배 이종범의 역할을 지켜봤기 때문에 박찬호는 주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종범은 이번 대표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사실 박찬호의 주장 발탁은 다소 의외라고 볼 수도 있다. 박찬호가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투수이기 때문이다. 본래 프로 구단에선 투수에게 주장을 시키는 경우가 별로 없다. 투수는 특성상 투수끼리 모여 따로 훈련을 받는다. 같은 팀 선수라 해도 경기 전 훈련 때면 투수와 타자가 얼굴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투수는 근본적으로 ‘혼자서 적과 맞서는 외로운 존재’다. 때문에 대부분 개인주의적인 성향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투수보다는 두루 동료들을 접할 수 있는 포지션플레이어(야수)에게 주장 완장을 채우는 게 일반적이다.
더욱이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 시절인 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하며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과는 그다지 교류가 없는 편이었다. 한국 프로리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서 14년간 선수 생활을 해온 그가 대표팀 주장을 맡는다는 소식에 야구 기자들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가 주장으로 선임된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박찬호는 대회 최종 엔트리 24명에 무조건 포함된다는 걸 의미한다. 김경문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 113승을 거둔 투수 아니냐. 박찬호가 마운드에 서있기만 해도 상대방이 기가 죽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메이저리그 경기에 관심이 많은 김 감독은 이번 예선전에서 어떤 형태로든 박찬호를 중용할 것임을 주장 발탁을 통해 암시한 셈이다. 또 하나는 이번 기회에 국내파 선수들이 박찬호에게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비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그가 가진 노하우를 조금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다면 젊은 국내파 선수들에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박찬호에게 국내 선수들과의 유대감을 나누도록 하려는 김 감독의 배려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프로야구는 가장 ‘프로스러운’ 스포츠다. 소속팀과 본인의 성적이 최우선이다. 종목 특성상 축구와 같은 A매치가 성사되기 어렵다. 때문에 선수들의 태극 마크에 대한 경외감도 덜한 편이다. 축구의 경우엔 대표팀 선발 자체가 다음 시즌 몸값을 급상승시키는 호재로 작용한다. 연봉 1억 원 받던 선수가 대표팀에 뽑히면 다음 시즌 연봉이 몇 배로 뛰는 경우가 허다하다. 야구는 그렇지 않다. 야구 국가대표팀은 어떤 면에선 귀찮고 피곤한 ‘번외 업무’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야구는 계절적인 ‘시즌 개념’이 명확하다. 한시즌 126경기와 피말리는 포스트시즌까지 치르면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11월과 12월에 또다시 대표팀에 참가해야 하는 그들로선 괴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병역 미필 선수들 외에는 이렇다 할 큰 메리트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같은 정신 자세가 대회 때까지 이어지면 곤란해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2월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이다.
당시 야구대표팀은 선수들이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대만에게 패하며 목표인 금메달 획득이 물 건너갔고 그 후 사회인 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일본에게마저 역전패하며 비난을 샀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곤란하다. 이번 대표팀 선수들은 이 같은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도하 아시안게임 멤버였던 이대호와 류현진 등이 대표적이다. “이참에 시원하게 되갚아주고 싶다”면서 의욕을 불태우고 있으니 좋은 징조다.
실은 WBC 대표팀 때에는 좋은 성적을 남기긴 했지만 팀워크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워낙 굵직한 메이저리거들이 많이 합류했고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됐기 때문에 국내파 선수들의 입이 삐죽 나왔던 것이다. 모 국내파 투수는 “해외파만 선수냐”면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4강 신화를 이루면서 불만이 잦아들었지만 근본적으로 조직력 와해 가능성이 숨어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같은 불안한 상황을 당시 주장 이종범이 어르고 달래면서 잘 이끌어나갔던 측면도 있다.
이번 대표팀은 팀워크나 조직력에서 문제점이 발생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 거의 대부분 국내파 선수들로 이뤄졌고 역할이 겹치기보다는 서로가 보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선수들로 구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도 각자의 한계와 역할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
투수진에선 박찬호와 맏형 격인 송진우(한화), 포수 가운데에는 박경완(SK), 내야수는 김민재(한화)와 이호준(SK), 외야에선 박재홍(SK)과 이병규 등이 후배들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선수단을 잘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가운데 일부는 최종 24인 엔트리에서 탈락할 수도 있지만 이번엔 오히려 탈락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김남형 스포츠조선 야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