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진(왼쪽), 김상우 | ||
2006년 은퇴를 선언하고 일찌감치 사회 생활을 선언한 김세진과 2007년 7월 유니폼을 벗은 김상우는 신진식과 함께 삼성화재를 이끈 트로이카였다. 1995년 삼성화재 창단 멤버로 인연을 맺은 뒤 삼성 9연패, 77연승의 대기록을 달성시킨 주인공으로 그들 인생에 ‘삼성화재’란 고유명사는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가족보다 더 친하다고 말할 만큼 10년 넘게 ‘찐한’ 우정을 이어온 두 사람을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의 신분으로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금요일 밤에 방송되는 배구 전문 프로그램 ‘스페셜V(매주 금요일 오후 10시)’ 녹화를 마친 그들의 솔직한 입담을 정리해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하고 심플하게 떨어지는 정장 차림으로 시선을 모으는 김상우, 정돈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모던하면서도 캐주얼한 차림으로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풍기는 김세진. 외모와 배구 인생, 은퇴 후의 생활 등등이 평행선을 달리다 해설이란 부분에서 공집합을 이룬 그들 사이엔 우정 이상의 사랑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호칭도 “자기야” “여보야”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뷰를 위해 스튜디오에 자리를 마련하고 앉자 김세진이 김상우에게 “자기야, 코트 벗어야지”라고 농담을 던져 한바탕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다.
>>>첫인상
김세진(진): 상우를 처음 본 게 중학교 때였다. 난 충북 옥천중학교를 다니다 상경한 탓에 서울에서 운동하는 상우가 너무 부러웠다. 그 후 유소년, 청소년 대표팀을 거치면서 한솥밥을 먹게 돼 친구로 지냈는데 같은 남자가 봐도 상우는 참 매력적이다. 카리스마도 있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무지하게 노력하는 스타일이고…. 특히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은 정말 탐이 날 정도다.
김상우(우): 세진이를 처음 봤을 때 키가 너무 작아서 오히려 눈에 띌 정도였다. 네트 밑을 머리 숙이지 않고 오갈 수 있는 선수는 세진이밖에 없었으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세진이가 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 세진이는 독보적이었다. 세진이의 매력이라면 주위에 정말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연예인, 사회 일반인들까지 다방면으로 ‘마당발’을 뻗치고 있다. 사회성이 많지 않은 나로선 세진이의 그런 점을 배우려고 하는 중이다.
>>>라이벌
우: 나도 한때 라이트 공격수로 잘 나가는 선수였다. 그러다 대표팀에서 세진이랑 자꾸 부딪혔다. 포지션이 겹쳐서. 대학 4학년에 올라가면서 고민 끝에 포지션을 센터로 바꿨는데 정말 많이 힘든 순간이었다. 세진이랑 붙어서 더 잘 할 자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난 왼손잡이도 아니고 신장이 큰 것도 아니고, 내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센터는 아무리 잘 해도 공격수에 비해 빛을 보기 어렵다. 똑같이 잘해서 경기에 이겨도 스포트라이트는 세진이나 진식이에게 간다. 그래서인지 신치용 감독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센터는 외로운 포지션이다”라고.
진: 나도 상우의 복잡한 심경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었다. 이 친구의 자존심이 있었으니까. 셋 중에서 상우가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신)진식이야, 후배고 포지션이 겹치지 않았으니까. 당시에 상우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속상했겠나.
>>>은퇴
우: 알긴 아냐?(웃음) 세진이가 날 버리고(?) 은퇴한다고 했을 때 속으론 ‘1년만 더 하지’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은퇴를 해보니까 세진이의 은퇴 시기가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1년 더 했다면 자기가 쌓아 놓은 명성에 누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월 앞에서, 나이 앞에선 장사가 없다.
진: 서른 살 넘어가고 후배들이 올라오는 걸 지켜보면서 나이 먹은 선수들의 머릿속에선 ‘은퇴’란 단어가 떠나질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단어가 떠오르고 은퇴 압박과 유혹 속에서 심하게 갈등할 때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선수 생활에 대해 조금의 미련도 없다. 만약 그런 미련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면 옷 안 벗었다. 선수로 뛸 수 있는 역량, 주위에서 날 보는 시선들, 몸 상태, 내가 절감하는 부분들…, 이런 모든 걸 봤을 때 ‘이제 됐다’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 그런 점에서 세진이가 부러울 때가 있다. 난 부상과 회복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은퇴 시기를 잡지 못했다. 지난 시즌에는 정말 마음 독하게 먹고 운동했다. 자존심 제대로 회복해서 멋지게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몸도 올라왔고 컨디션도 좋았는데 또 다시 부상을 당했다. ‘여기까지인가?’ ‘여기까지구나!’ 내 운이 이것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체념이 되더라. 지금은? 정말 미련 없다. 설령 해설 안 하고 놀고 있었다고 해도 운동에 대한 미련도 그리움도 없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고 너무 아팠고 또 너무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한마디로 홀가분하다.
진: 상우는 무지 고생했다. 어쩌면 몸보다 마음을 더 다쳤는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구단에서 선택한 은퇴랑 선수가 선택한 은퇴는 차이가 난다. 난 내가 싫어서 나온 거지만 상우는 달랐다. 구단에서 좀 더 배려를 해주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퇴장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길 바랐는데…, 좀 아쉽다.
▲ 7일 여의도 KBS 별관에서 ‘스페셜V’ 녹화를 마친 배구 스타플레이어 출신 김세진, 김상우 해설가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우: 은퇴 결정보다 은퇴 후의 생활도 고민이 많았다. 내가 모델을 한다고 알려진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그냥 이름만 올려놓았을 뿐이다. 수입 차 딜러로는 일을 할 뻔했는데 최종 결정 부분에서 직급 문제로 이견을 보여 무산됐다. 내년 봄부터 대학원에 다니며 오랜만에 공부를 하게 된다. 열심히 배우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해 볼 것이다. 자꾸 급하게 가려니까 잘 안 되는 것 같다.
진: 난 상우보다 먼저 은퇴를 했기 때문에 사회 경험이란 게 생겼다. 건설회사도 다니고 식당업도 하고…. 시대적 흐름이 워낙 빨라서 한 가지에 안주하지 못한다. 사업 수완이 많기 보단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접을 땐 확실하게, 시작할 땐 빨리(웃음). 사업이란 게 운때도 맞아야 하고 내가 가진 기술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등이 조화롭게 이어져야 한다. 운동할 때부터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해 고민했고 나름 준비를 했었다. 내가 사회랑 부대끼고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스타일이라면 상우는 공부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한다. 자기가 노력해서 뭔가를 만들어 가는 스타일이라 별로 걱정이 안 된다. 같이 지내면서 형처럼 의지하고 살았다.
우: (김세진에게)야! 내 걱정 좀 해줘. 너무 방관만 하지 말고(웃음).
>>>지도자
진: 상우야, 기자가 우리에게 진식이랑 너, 나 중에서 누가 먼저 지도자가 될 것 같으냐고 묻는데 이건 답이 뻔히 나와 있지 않냐?
우: 그렇지. 진식이잖아. 회사에서 유학도 보내줬는데 본전을 뽑아야지^^. 솔직히 지도자는 매력적인 직업이다. 자기의 청춘을 바친 분야에서 선수들을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하지만 내가 그 정도의 역량이 되겠나. 제대로 선수 생활을 못했는데 누굴 가르치겠나.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깊게 고민할 부분이다.
진: 난 오래 전부터 지도자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워낙 여러 분야에 호기심도 많고 직접 해보고 싶은 일도 다양해서 배구에만 집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배구장을 떠나고 싶진 않다.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배구와 관련해서 할 일이 많이 있다.
>>>해설
진: 지난 시즌 처음 마이크를 잡았는데 그때만 해도 김세진하면 삼성화재 선수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 번 현대캐피탈과 상무 경기 해설을 맡아 경기 전에 김호철 감독님을 찾아갔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지난해 하셨던 멘트를 똑같이 하시더라. “여기 자꾸 들어오면 안 되는데…” 하시면서. 내가 해설하는 김세진이지 삼성화재 김세진이 아니지 않느냐며 애교 섞인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다른 팀 관계자들도 많이 달라지신 것 같다. 해설위원으로 대우를 해주시는 걸 보면.
우: 이상하게 난 해설하는 게 재밌을 것 같았다. 겁나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지난 번 수원에서 처음으로 중계 해설을 맡았는데 아주 흥미진진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돼 상대 선수들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던 터라 크게 힘들지 않았다. 적성에 맞는다는 느낌이 든다.
진: 상우야, 네가 방송 체질인가보다! 이거 몰랐네 하하.
>>>신치용 감독
진: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나한테는 진짜로 아버지 같은 존재다.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이 피해를 볼 수도 있지만 그의 중심과 힘 때문에 주변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면 좋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만큼을 했다면 그만큼을 해주시려고 노력하신 걸 잘 알고 있다.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 스승이다.
우: 그동안 감독님에 대해 섭섭한 감정도 있고 좋은 부분도 있었지만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하시는 모습에서 절로 존경스러움이 들 정도다. 몇 년 전부터 오전에 선수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감독님이 한 시간씩 뛰시더라. 그래서 “왜 이렇게 뛰세요?”라고 여쭤봤더니 “야, 이렇게 안 하고 못 버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제 감독님도 가셨네요”라고 말했다가 한방 먹었다.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이시다.
진: 개인적으로 감독님과 자주 만난다. 이전에는 선수들한테 서운한 게 있어도 잘 표현 안 하셨는데 요즘엔 서운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외로워 보였고 나이가 드셨다는 것도 느꼈고…. 그 위치에 이 정도 오랜 시간 팀을 끌고 가려면 그런 아픔, 외로움을 참고 안고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화면에 나타나는 얼굴이 작년과 또 다르신 것 같다. 눈 밑에 지방도 잡히고…^^. 상우야, 은퇴했으니까 이제 뭐라 안 하시겠지?
김상우는 친구 김세진에게 “제발 주위 사람들만 챙기지 말고 자기 실속을 챙기라”고 당부하면서 “결혼해서 안정을 이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고 김세진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잘 해낼 수 있다. 급한 건 끝도 빨리 찾아온다”며 김상우의 사회 생활에 대해 조언을 했다.
‘동기’는 많아도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이 몇 명 안 된다는 김세진과 김상우. 은퇴한 선수들끼리는 ‘지겨워서’ 만나지 않는다는 두 사람은 은퇴 후 사회인으로 또 다른 우정을 신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