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끝난 후 유 의원은 기자들의 질문에 별다른 답을 않고 국회를 빠져 나갔다. 본인과 이명수 정책위의장 후보를 뺀 5표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 친박계 의원은 투표 직후 “이번에는 우리(친박)가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여러 루트로 말이 들어갔을 텐데…. 고집의 결과”라고 혀를 찼다. 친박계는 이번 원내대표 경선의 결과로 크게 3가지 팩트(fact)를 체크했고, 이를 바탕으로 곧 당권플랜을 기획할 것이란 말이 회자하고 있다.
5월 3일 열린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팩트 체크 1. 비박계 숫자는 46명이다.
박대비소(朴大非小). 친박은 많고 비박은 적다. 이날 원내대표 경선이 이뤄진 당선자 총회 참석자는 119명이다. 김무성 전 대표와 김용태 서울시당위원장, 하태경 의원이 빠졌다. 김 전 대표는 공식활동을 자제하고 있고, 김 위원장은 다른 행사로 늦었다고 해명했으며 하 의원은 부산에서 부친상을 치르던 중이었다.
셋은 모두 비박계로, 특히 김 위원장은 중립쇄신파로 꼽힌다. 20대 국회 새누리당 의석수가 122명으로 이 중 46명(나경원-김재경 조 43표+불참자 3표)의 비박계를 빼면 76명(62.3%)이 친박계인 셈이다. 향후 친박과 비박의 양자대결로 세력 경쟁이 있다면 친박이 백전백승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날 친박계 핵심 최경환 의원은 1차 투표를 끝낸 직후 곧바로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굳은 표정이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결선투표까지 볼 필요도 없이 1차에서 결과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있다. 즉, 친박계에서는 누구를 지원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정리됐고 하달됐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청원 전 최고위원 등 친박계 핵심부도 대거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친박계 표가 정진석 후보와 유기준 후보로 나뉠 경우 나경원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란 예측은 헛된 망상이었던 셈이다.
충청과 대구경북(TK), 수도권과 부산경남(PK), 부산과 충청의 조합은 절묘한 지역 안배였다. 하지만 정치권 호사가들은 모두 TK의 움직임을 주시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TK의 움직임이 곧 친박의 메시지로 통했고, 유승민 의원이 무소속인 지금 TK는 최 의원에게 눈길이 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김광림 정책위의장 당선인은 세 후보 모두로부터 정책위의장 후보직 제안을 받았지만 정진석 당선자를 택했다. 언론 인터뷰에서도 김 의장은 “최경환 의원과 상의를 한 건 사실이다. 최 의원은 TK 의원들이나 당선자들과 잘 상의해 결정하시라고만 충고했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앞서 유기준 의원의 출마 당시 ”유 의원은 친박계 단일 후보가 아니다. 출마를 자제해 달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일각에선 유기준 의원이 이번 경선을 통해 사실상 친박계로부터 파문을 당한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친박계 홍문종 의원은 경선 뒤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유 의원이) 친박을 탈퇴한다고 했지만 결국 친박 탈퇴는 어려울 것이란 의원들의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유 의원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유 의원께) 여러 번 지금 의원들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며 이번에는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정진석 새누리당 신임 원내대표.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 팩트체크 2. 친박계 출석률은 100%였다.
이번 경선에서 친박계 출석률은 100%였다. 초선에서부터 최다선 의원까지 모두 국내에 거주하며 본인들이 미는 후보가 원내대표에 당선되도록 결집했다. 친박계 목표는 박근혜정부의 조기 레임덕을 막고 친박계 정권재창출을 이뤄내는 것으로 그 첫 과제를 수행한 셈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해외로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지역구 행사 등으로 총회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완전히 바뀐 것”이라며 “그만큼 친박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유기준 의원에게 투표한 5명의 친박은 이미 친박계 내에서 용인된 숫자라는 말도 있다. 대세에는 지장이 없으니 유 의원의 체면은 세워줘야 한다는 말이 나왔고 두 자릿수까지는 아니지만 지원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당장 ‘유칠준’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유 의원과 그 주변부는 상당히 낙담한 분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친박계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유 의원이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이런 결과를 보임으로써 친박계도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론을 잘 이해하고 있고, 아군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어도 당이 변화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됐다”고 말했다.
# 팩트체크 3. 친박계 당권플랜 승산 있다.
친박계의 다음 플랜은 당권이다. 계파 색채가 옅은 정진석-김광림 조의 승리는 친박계의 당권 도전에의 길을 열어줬다. 하나의 계파 일색 정당은 경쟁과 견제가 없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는 설득 작전이 먹힐 수 있다. 2014년 7월 14일 당시 친박계가 전폭적으로 밀었던 서청원 최고위원이 김무성 대표에게 진 전당대회가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직접 찾아와 서 최고위원을 암묵적으로 지원했을 정도였다. 친박계는 당시 원내대표가 최경환 의원이었음을 기억한다. 당원과 대의원들은 일색(一色)의 정당을 싫어한다.
이미 친박계에서는 이정현 전 최고위원이 당권 도전을 선언했다. 홍문종 의원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라며 사실상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지금은 “할 마음이 없다”는 최경환 의원도 등 떠밀려 나가는 모습으로 출마가 예고된다. 이밖에 이주영 한선교 정우택 의원까지 친박계 내에서 당권 주자는 여럿이다.
친박계 한 4선 의원은 “각 시도에서 친박계가 한 명씩만 나오면 사실상 당 지도부 석권도 가능하다. 여성 몫과 지명직을 빼고서라도 친박계의 당 장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라며 “하지만 전당대회를 접수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조기 전당대회보다는 후기 전당대회를 열어야 한다. 이는 최대한 총선 참패의 책임론이 희석된 뒤 나서야 명분이 선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이 늦어지고 비대위 활동 시간도 길어야 한다. 실제로 지금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또 앞서 중진 친박계 의원 이야기처럼 친박계 후보 간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지역구별로 출마자가 중첩되어선 표가 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친박계지만 초선 당선자가 많은 만큼 전당대회가 밀리는 사이 지역구를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공천과정에서 낙천한 전직 의원들이 조직을 제대로 인수할지는 확약할 수 없다. 어찌됐든 친박계는 당권장악을 위한 1부 능선을 넘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