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여성 중 최초로 바둑 9단에 오른 박지은 프로. 앳된 외모이지만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면 정규교육도 뿌리치고 바둑에 올인한 ‘강단’이 엿보인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인터뷰 직전에 치른 제5회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예선 주작 8강에서 프로 1단 이슬아에게 아깝게 패한 탓에 박지은 사범은 꽤 힘들어 했다. 대국 결과를 전해 듣고 기자가 “9단이 1단에게 질 수도 있느냐?”란 ‘깨는’ 질문을 하자 박 사범은 웃으면서 “그게 바둑이다”라고 답했다.
2008년 1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여자 바둑 선수권대회에서 ‘반상의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을 물리치고 우승함으로써 한국 바둑 사상 최초로 여류 9단에 오른 박지은 사범. 반상 앞에서는 조금치의 흔들림이 없는 카리스마를 작렬하지만 사석에선 스물다섯 살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앳된 외모에 수줍음 많고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소녀’같았다.
:::: 바둑과 사랑에 빠지다
“처음 바둑을 둘 때 친구들이 무지 신기해했어요. 평소엔 산만하던 애가 어떻게 꼼짝 않고 앉아서 바둑을 두느냐고.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이상하게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마음이 안정됐거든요.”
남자도 아닌 여자가, 그것도 초등학교 때부터 공기놀이보단 바둑알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는 박지은 사범은 바둑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바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박 사범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도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더 이상 공부와 바둑을 병행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친구들에게 ‘학교 그만두고 바둑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특기생으로 진학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학교 다니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바둑을 배우기에도 시간이 빠듯했으니까요. 바둑이 제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라고 믿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바둑에 올인한 셈이죠.”
아버지의 찬성과 어머니의 반대가 맞물리면서 잠시 혼란스런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지만 박 사범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고 한다.
“흔히 바둑을 잘 두면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잘한다고 하지만 전 공부하기가 싫더라고요. 지금도 학업 중단을 후회하진 않아요. 그러나 제 인생에 ‘학창시절’이 없다는 건 좀 아쉬울 때가 있어요.”
:::: 집착이 부른 ‘화병’
친구들이 고3 수험생이 돼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전 박 사범은 입단 대회를 두드렸다. 즉 프로 데뷔를 위해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고 여섯 차례의 입단 도전 끝에 97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프로에 입문하게 된 것.
그러나 프로 입단은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었다. 매주 계속되는 대국과 세계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승패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내성적인 성격도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 이창호 9단. | ||
2002년 박 사범은 중국에서 열린 여자세계대회 호작배 결승에서 윤영선 사범을 맞아 반집 차로 패했다.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그는 한동안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고 한다.
“바둑이 아니면 박지은도 없다고 생각할 만큼 바둑에 빠져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승부에 연연해하게 됐죠. 대국에서 진 날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무서워할 만큼 표정이 굳어져요. 어느 순간부터 계속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간 바둑을 오래 못할 것 같더라고요. 책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운동을 즐기면서 조금씩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요즘은 말도 잘하고 자주 웃고 농담도 즐기는 스타일로 바뀌었는데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면 이런 변화에 적응을 못하더라고요.”
::::팬이 만들어준 스캔들
박지은 사범과 관련된 기사를 검색하다가 이창호 9단과 박 사범이 결혼하길 바란다는 바둑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들을 접할 수 있었다. 박 사범은 기자의 얘기를 듣다가 “또 그 얘기예요?”하면서 웃음을 터트린다.
“(이)세돌(프로 9단)이가 일찍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지내니까 프로 기사들의 결혼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요. 특히 세돌이가 저랑 동갑내기다보니 ‘누군 결혼했는데 너는?’하는 식으로 관심을 표하더라고요. 팬들이 바라는 이창호 9단과의 결혼은 정말 재밌는 얘기예요. 둘만 따로 만난 적도 없고 평소 얼굴 보기도 힘든 사람인데 어떻게 결혼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한 선배는 ‘너희 둘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천재가 나올 것’이라며 흥미있어 하시더라고요. 이 사범과 자꾸 엮으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창호 9단, 눈 높아요!’라고.”
얼마 전 친한 선배랑 같이 이 9단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말수 적기로 소문난 이 9단이라 선배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침묵과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고. 잘 웃고 밝은 성격을 가진 남자가 좋다는 박 사범은 만약 이 9단과 데이트를 한다면 굉장히 재미없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훈현, 유창혁, 서봉수, 이세돌 9단과 모두 대국을 해봤다는 박 사범. 그러나 이창호 9단과는 아직 한 번도 반상 앞에서 만난 적이 없단다.
“꼭 한 번 겨뤄보고 싶어요. 10년 넘게 프로 생활을 했는데 한 번도 대국을 갖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세계 1인자는 어떤 점이 다르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는지도 궁금해요. 이 사범에 대한 관심은 바둑이지 그 외의 부분은 전혀 없어요.”
박 사범은 1월 17일 중국 베이징에서 끝난 제1회 원양부동산배 세계여자바둑대회 결승전에서 ‘반상의 마녀’ 루이나이웨이 9단을 2 대 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여류 세계 대회 우승자에게 1단 승단을 허용하는 새로운 한국기원 승단 규정에 따라 8단에서 입신(9단)의 경지에 오른 그는 세계 여류기사의 전설로 인식되는 루이나이웨이에 대해 존경심을 나타냈다.
“제가 아는 프로 기사 중 최고로 열심히 연구하는 분이세요. 정말 바둑을 좋아하고 바둑 두는 것 자체를 즐기는 분이시죠. 나이 어린 기사들은 승패에 따라 얼굴에 감정이 나타나는데 루이 9단은 승패보단 바둑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같아요. 한국에 자리를 잡으신 후 여류 기사들에게 엄청난 영향과 자극을 준 분입니다.”
루이나이웨이는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박지은에게 패한 후 유창한 한국말로 “이겼으니까 밥이나 사라”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줬다고 한다.
바둑계에서는 박지은, 루이나이웨이 9단과 조혜연 7단을 먹이사슬의 관계로 보고 있다. 루이나웨이가 박지은에게 약하고 조혜연에게 강한 반면 박지은은 루이나이웨이에게 강하고 조혜연에게 유독 약한 징크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조 7단과의 대결은 항상 자신감을 갖고 임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라이벌’ 운운하니까 자꾸 신경이 쓰이고 부담이 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의식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게 더 의식이 돼요.”
박 사범은 하루라도 연구를 하지 않으면 만만치 않은 기세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의 공격을 버틸 수가 없다고 한다. 루이나이웨이나 조혜연 사범보다 오히려 후배들의 도전이 더 부담스럽다는 반응이다.
운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프로 기사지만 박 사범은 매일같이 새벽에 일본어 강습, 저녁엔 요가를 배우면서 틈틈이 암벽타기, 마라톤, 웨이트트레이닝 등의 운동을 즐긴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프로 생활을 하다 보니 마인드 컨트롤, 자기 절제 등의 반복된 훈련이 없으면 유혹에 빠지기 십상인 게 프로 기사들의 세계라고 한다.
“한때 놀러 다니는 게 재미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런 생활을 지속하면 바둑을 잘 둘 수가 없겠더라고요. 일부러 아침, 저녁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을 듣고 배우기로 했어요. 워낙 움직이는 걸 좋아해서 지금까진 뭐든지 재밌어요. 앞으로 요리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는 등 취미 생활의 영역을 넓힐 작정이에요.”
최근 대학에 진학한 프로 기사들이 늘어나는 상황에 대해 박 사범은 뚜렷한 주관을 피력했다.
“공부요? 전혀 할 마음이 없어요. 그 시간에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요. 지금 검정고시 치르고 학위를 딴다면 정말 졸업장 때문인 거잖아요. 학교 안 다니고 제가 하고 싶은 걸 배우는 게 지금의 상황에선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박 사범의 인생 목표는 일반 랭킹 10위 안에 오르는 것. 여자 랭킹 1위인 루이나웨이를 넘어서 남자들과 상대해 10위 안에 입성하는 게 ‘여전사’의 꿈이자 소원이라고 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