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홍순국 프리랜서 | ||
지난 12일, 매케니필드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 식당에서 김병현과 식사를 함께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6개월 전 플로리다 말린스 경기장에서 진행된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담긴 <일요신문>을 건네자 김병현은 곧장 포즈를 취하며 “역시 일요신문은 전면광고가 최고야”라는 농담도 넉살좋게 던졌다.
피츠버그와 새로운 인연을 맺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로 인해 마음고생을 단단히 했다는 김병현은 침울해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인터뷰 내내 재미난 입담과 미소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피츠버그와의 계약, 내 자신에게 창피할 정도 “아직도 씁쓸한 마음이 남아 있어요. 에이전트를 믿고 기다렸다가 뒷통수 맞은 느낌이었거든요. 이런 쪽에 전문가니까 선수가 이런저런 간섭을 하기보단 좋은 방향으로 가이드해 줄 거라 생각했어요. 지난 3년 동안 선발만 했어요. 팀에서 뭐라고 해도 선발을 고집했고 선발을 조건으로 내세우며 팀과 협상도 벌였고요. 그런데 결국엔 모든 게 무너졌어요. 전 지난해 제가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믿었어요. 플로리다에서 불러만 준다면 액수와 상관없이 계약할 의향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아, 그 고생을 했는데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싶더라고요. 여기에(야구에) 집중할 거 그냥 다른 거나 해 볼까 싶기도 했고요.”
그만두려고 운동을 안 한 적도 있다? “맞아요. 그냥 운동하기가 싫어지더라고요. 잠깐 논 적이 있어요. 한 2주 정도 됐나? 기분요? 좋더라고요. 편하고.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싶어서. 절 모르는 사람들은 ‘김병현이 배가 불렀구나’하고 말하실 거예요. 20년 동안 한 곳만 바라보고 왔어요. 중간 중간에 고비는 있었지만 제가 잘 할 수 있는 걸 계속 해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처한 상황이나 미래가 더 이상 좋아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다른 걸 해보고 싶더라고요.”
야구 안 하면 평범하게 살고 싶다 “저 정말 열심히 운동했어요. 욕먹어 가면서도 운동만 했어요. 그러다보니 이젠 지칠 때도 된 거죠. 야구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렇다고 평생 야구만 하고 살 수는 없고…. 나중에 제 인생을 돌아봤을 때 야구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굉장히 허전할 것도 같아요. 만약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야구 안하고 일반인들처럼 공부하고 싶어요. 여름방학, 겨울방학 꼭꼭 챙겨서 놀고 추석, 설날, 크리스마스 뭐 이런 것도 챙겨서 쉬고, 5일 근무하고 이틀 노는 그런 직업을 얻고 싶어요.”
야구로 인해 얻은 것들 “야구가 저한테 준 게 되게 많아요. 아쉬운 거라면 제가 옛날만큼 그 야구를 잘 못한다는 것…. 그런데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계속해서 잘나갔으면 남 아프고 힘든 부분들, 잘 몰랐을 거예요. 한번 ‘바닥’을 쳐 보고, 나락으로도 떨어져 보니까 제가 몰랐던 게 너무 많더라고요. 옛날엔 야구 못하는 선수들 보면서, ‘왜 저걸 못하지?’란 생각을 했어요. 선수들이 아프면 ‘왜 아프지?’ 했었죠. 그런데 제가 운동이 안 되고 부상을 경험해 보니까 그 친구들의 상황을 이해하겠더라고요. 뒤늦게 철이 든 거죠.”
▲ 김병현 선수가 6개월 전 <일요신문>과 플로리다 말린스 경기장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있다. | ||
유일한 메이저리거? “저, 그 말 너무 싫어요.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아직 계약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박)찬호 형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유일할지, 유이할지, 전무할지는 모르는 일이죠. 한국에선 메이저리그를 대단하게 평가하지만 막상 여기 와보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돼요.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여기 오면 통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아요. 여건이 안 돼서 못 올 뿐이죠. 여기서 야구를 배우고 좋아하는 선수들이랑 같이 뛰고 그러니까 기분이 좋은 거지, 야구는 다 똑같아요.”
한국에서 야구하라고? “저한테 돌봐야 할 아내와 아이가 있고 생활하기 힘들었다면 재응 형, 선우 형처럼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당장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데 어디 다른 걸해요. 백년, 이백년 야구만 해야지. 물론 전 형들에 비해 좀 나은 상황이잖아요. 책임질 처자식도 없고 가족들 살 수 있게끔 기반도 마련해 놨고요. 한국 야구로 돌아갈 생각 있냐고요? 야구는 어디서 하든 다 똑같아요. 메이저리그에서 하든 일본, 한국에서 하든. 어떤 분은 제가 한국 무대에 선다면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을 거라고 말씀 하시대요. 솔직히 제 앞가림도 못하는데 꿈과 희망이 어디 있어요? 미국에서도 욕 먹는 거, 한국에 들어간다고 달라지겠어요? 4년 전이었다면 또 몰라요. 그때는 제 공에 대해 자신도 있었고 부끄럽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마음에 안 들 때도 많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죠. 한국에서만큼은 돈 받고 부끄러운 공은 던지고 싶지 않아요.”
외국 생활이 외롭다? “당연히 외로움을 느끼죠. 집에 들어가서 불을 딱 켜고선 혼자 그래요. ‘어? 아무도 없네’라고. 그것도 운동 잘 될 때는 괜찮아요. 경기를 엉망진창으로 끝내고 나면 엄청 열 받고 엄청 우울하죠. 처절하게 외로움을 느껴요. 아무도 절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참, 불펜 투수하면 좋은 점이 있어요. 하루만 망가지면 그 다음 날 괜찮아질 수도 있다는 것. 예전에 불펜할 때는 잠을 못 이뤘어요. 제 자신한테 화가 나서.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아, 시즌은 길구나. 이번 한 게임 망가졌다고 속상해 하지 말자’라면서 마음을 다독이죠. 선발투수는 한 번 망치면 4일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 기다림이 좀 성질 날 때가 있어요.”
김병현이란 ‘남자’에 대해 “일반인 김병현은 꿈과 희망이 없는 애라고 표현할까요? 나쁜 애는 아니에요. 가끔씩 엉뚱한 짓을 벌이긴 해도. 남자로서요? 이것저것 재지 못해요. 속 편하게 살고 싶어 하고. 앞에서 보이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사기치는 것 같다고 해도 그 사람이 인간적으로 끌리면 그냥 눈 감아주고 가요. 제가 먹고 살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이런 모습 때문에 종종 멍청하다는 소리도 들어요.”
김병현은 지난 시즌을 마치고 귀국해선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들이 찾은 곳은 완도 명사십리였다. 왕복 5시간을 차에서 보내며 부모님과 오랜만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는 그는 “워낙 떨어져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몇 개월 만에 얼굴 봐도 부모님께 그리 살갑게 대하는 아들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고등학교때 야구가 너무 힘들어 감독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백 대 맞고 그만 두라’는 말에 두들겨 맞을 자신이 없어 포기했던 게 여기까지 왔다는 김병현의 우스개 소리에 한바탕 큰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미국에서의 야구 생활을 후회하진 않아도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드는 게 안타깝다는 표현도 이어졌다.
2008년 시즌을 어느 해보다 위태롭게 준비하고 시작하는 김병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하루하루가 ‘우울 모드’는 결코 아니다. 올시즌 세이브 기록에 관심을 두기보단 그저 올 한 해 부끄럽지 않은 공을 던지고 활짝 웃는 김병현의 모습을 기대할 뿐이다.
미국 브래든턴=Sophie J. Shin 통신원
정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