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7일 과수원에서 일하다가 목을 축이는 손학규 전 지사.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지가 이제 남은 그의 과제다. |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한때 별명은 ‘수첩공주’였다. 그가 대표취임 초기 회의 때마다 탁자 위에 수첩을 펼쳐놓고 자신이 적어온 메모를 보면서 말하는 것에서 유래된 별칭이다. 그런데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도 100일 민심대장정 기간 동안 늘 자신의 수첩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기록하는 ‘메모광’으로 불렸다. 하지만 수첩의 용도는 박 전 대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박 전 대표의 수첩이 자신의 ‘말씀자료’를 국민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알리기 위한 아웃풋(Output) 기능이 주였다면, 손 전 지사의 그것은 지난 100일 동안 만났던 서민들의 땀과 눈물을 잊지 않고 기록해둔 인풋(Input)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
<일요신문>은 손 전 지사가 깨알 같은 글씨로 그가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기록해둔 개인 수첩을 긴급 입수해 그의 100일 민심대장정을 되짚어본다.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는 평소 사석에서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꼭 기억해야할 조언을 들으면 여지없이 수첩을 펼쳐들곤 한다. 그런데 그 ‘습관’은 지난 100일 민심대장정 기간에 확실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어딜 가든지, 누구와 이야기하든지 그는 일단 수첩부터 꺼내든다. 그리고 눈을 살며시 위로 뜨며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기 위한 준비자세에 들어간다. 영락없는 기자의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그가 민심대장정 100일 동안 쌓아온 수첩(경기도 발행 100페이지짜리)은 10여 권에 이른다. 거기에는 그가 대장정 동안 만났던 우리 이웃들 삶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 있다. 손 전 지사는 하루에 보통 20~30명씩 많게는 100명 이상의 국민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따지면 100일 동안 줄잡아 3000명 정도의 국민과 대화를 나눈 셈이다. 그리고 그를 도운 자원봉사자는 800여 명에 이른다. 정치권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그를 방문한 현역 국회의원도 30여 명을 넘어선다.
이렇듯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정작 자신은 최대한 말을 아꼈다. “오로지 듣기 위해 왔다”는 대답과 함께 국민들이 토해내는 삶에 찌들린 생생한 목소리들을 자신의 수첩에 오롯이 적어놓았다. 손 전 지사는 이번 대장정 동안 농촌과 중·소도시 위주로 방문했기 때문에 그의 수첩에는 특히 농민들의 고충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였다(수첩 내용은 손 전 지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내용은 편집했다).
△한 아버지의 토로. “아들이 10년 농사 후 3억 빚만 졌다.”
△일할 사람이 모두 떠난 농촌 현실에 대해 한 촌로의 한탄. “나 요새 신혼생활 합니다.” (농촌 노인 부부만 사니까)
△어떤 농부. “김대중이 빚 탕감 해준다고 했는데 더 빚내서 쓰고 있다.”
△진주 대곡면 마진리의 한 농민. “공무원 정치인 기업인들이 농민의 머리를 밟고 다녀 그 사람들 발바닥에 농민들의 피가 묻은 머리카락이 잔뜩 묻어 있다.”
△김해의 한 택시기사(49). 현재는 택시, 지난해까지 20년 동안 화훼 농사 경험했다. 그런데 국화 장미는 기름값 때문에 모두 실패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여러 사람에게 죄 짓는 거다. 친구 친척 동생들에게 죄 짓는 거다. 그 사람들 빚을 못 갚아 주었다. 정부에서 뒷바라지 못한다”고 한탄.
△농협 빚더미에 올라앉은 한 농민. “현재 빚이 5억 원이다. 농가 융자는 시설 영농 대출 이자가 연 5%다. 그런데 1년만 지나면 연체 걸리기 일쑤다. 농사 자금 대출은 연기도 안 된다. 그래서 신용불량자가 안 되려면 일반대출로 전환했다. 빚 때문에 스트레스가 겹쳐 안면마비 증세까지 오고 있다.”
△한 농민. “농사? 눈물밖에 안 나온다. 원망스럽다. 우리가 힘이 있어 벽돌을 찍으러 가나? 내 몰래 석유 끼얹고 청와대 앞에 자살하고 싶다.”
△농민. “쥑일 놈들 억수로 많다. 농사짓는 사람 착하다. 바보다.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농협에서 하라는 대로 했고…. 빚으로 먹고 산다. 농협이 지주고 농사꾼은 소작농이다. 빚으로 먹으니까 살로 안 간다.”
△“출산 정책은 애기당 3백만원인데 그것 갖고 되나?”
△“제발 이북에 뭐 보내주지 좀 마이소.”
△경찰이 (취객에게) 뺨을 맞는 사회.
△9.15 부사관 부인들과 면담. “10가족 중 9가족은 집이 없다. 결혼 생활 25년 했지만 1억이란 단위가 무척 큰 액수다. 애들 아빠 봉급만 갖고는 빚밖에 생길 게 없다. 군부대 땅을 전원주택 조성해서 분양해주면 좋겠다. 생활수준은 높아졌는데 봉급이 안 된다. (애들이) 아빠 보면 울고 나중에는 군복 입는 사람만 보면 아빤 줄 안다.
△9.15 작가 이외수와의 만남. “예술은 개인이 하는 것인데 집단이 주도하고 있다. 집단이 정부보조금을 독점한다. 예술자체는 쇠퇴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때는 예술인 완장조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패배의식 걱정이다.
△평생의 목표가 행복이라야 하는데 취직이 전부가 돼 버린 것 같다. 인간의 문제.
△개인택시 월수입이 100만 원이 안 된다. 시외버스 150만 원의 반밖에 안 된다. 회사택시 사납금은 3만 원/24시간이다. 그런데도 사납금 못 채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름값 2만 5000~3만 원도 못 채워 허덕인다.
△마로광업소에서(손 전 지사는 지난 9월 11일 민심대장정 74일째를 맞아 충북 보은군 마로면에 위치한 (주)성하 마로광업소(소장 홍승희)에서 하루 종일 광부들과 채탄작업을 했다. 그는 이날 광부들로부터 “인생 끝에 가는 곳인 막장에 와서 또 끝까지 들어갔다”는 칭찬(?)도 들었다고 한다). 7월1일부터 주 5일제가 시행되면서 작업일수가 52일이나 감소했다. 광부들은 일급제로 8만~10만 원을 받는데 작업일수가 감소해 그에 대한 정부보조가 미흡하다. 마로광업소는 전국 7개 탄광 중 가장 소규모라고 한다. 한 해 매출은 70억~80억 원 수준이다.
앞장막이(탄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 장막을 치는 일)는 내려오는 것 막고 뒤를 끊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손 전 지사는 수직 깊이 400m의 마로광업소에서 8시간 동안 탄광 작업을 마친 뒤 광부들에게 “오늘 막장에서 앞장막이가 밀려 내려오는 탄 무게에 부서지고 휘어지는 것을 보며 작업했다. 앞장막이처럼 앞에서 막아주고 뒤를 끊어 탄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는 것이 정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손 전 지사의 수첩에는 국민들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반면 여의도 정가에는 정권 재창출과 정계개편 이야기만 난무하고 있다. 이번 추석에는 여의도 정치인들이 잠시 정계개편 이야기를 접고 ‘신문고 수첩’ 하나씩 들고 국민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