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청 핸드볼팀을 지휘하고 있는 임오경 감독.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임오경 감독(37·서울시청). 2008베이징올림픽 동안 MBC 해설위원의 자격으로 베이징을 찾았던 그는 여자핸드볼 경기를 중계하면서 TV를 통해 눈물을 쏟고 감정을 흘리며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후 매스컴의 집중 취재 대상으로 꼽힌 그는 베이징올림픽 이후에도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 출연과 계속되는 인터뷰 일정 등을 소화하며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지난 4일 저녁 무렵, 서울 올림픽공원 부근의 한 일식집에서 열린 서울시청 핸드볼팀 선수단 회식 자리에서 임오경 감독을 만났다.
―올림픽이 끝났지만 그 감동과 여운은 오래가는 것 같아요. 올림픽 기간 동안 정신없이 지내셨을 텐데 후유증은 없었나요?
▲전 해설위원 자격으로 베이징에 갔던 거잖아요. 그런데 마치 경기를 치르고 온 선수처럼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쌓이더라고요. 베이징에서 체중이 3~4kg 빠졌어요. 그만큼 신경을 썼다는 소리겠죠? 해설이 처음이라 부담도 많았고 일본에서 14년을 생활한 탓에 우리나라 말이 트이지 않아 긴장감이 더했어요.
―여자핸드볼 노르웨이전에선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통한의 한 점차 패배를 당할 때 울음 섞인 해설로 시청자들을 더 울컥하게 만드셨어요.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그랬었고요.
▲이번에 새삼 느낀 게 전 아직도 (해설을 하기엔) 멀었더라고요. 경기를 보는데 객관적인 입장이 안 되고 계속 제가 선수들과 같이 뛰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음 같아선 중계석을 벗어나 코트 옆으로 달려가고 싶었어요. 선수 때나 감독이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 구멍들이 너무 잘 보였거든요. 그 부분을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보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중계석에 들어가기 전에는 감정 흘리지 말고 무게감 있게 해설하자고 독하게 마음먹어요.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피 말리는 승부가 계속되다보면 저절로 코트 속으로 빠지게 돼요. 눈물도 정말 많이 참았던 건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울고 있더라고요.
―시청자들은 임오경 감독의 솔직한 해설, 심금을 울리는 해설을 좋아했을 거예요. 굉장히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왔거든요.
▲해설 마치고 나면 항상 후회가 됐어요. 상대팀 전력이나 선수들에 대해 밤새 공부하고 연구했던 건 하나도 꺼내놓지 못하고 그저 우리 선수들 플레이와 부상, 경기 내용 등에 대해서만 열을 낸 것 같아 창피스럽기도 하고 체면도 안 서고…. 제가 경기 전에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징크스가 있어요. 이번 올림픽 때도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기르면서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했는데 하도 손을 꽉 움켜쥐고 긴장하면서 방송을 한 탓에 경기 끝나고 나면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빨갛다 못해 멍이 들 정도로 진하게 박혀 있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면 어떤 게임을 꼽을 수 있을까요.
▲첫 시합이요. 러시아와 첫 예선전에서 우리가 7점 차로 뒤지고 있다가 결국 동점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때 해설보단 소리만 질렀던 것 같아요.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리고 준결승전이었던 노르웨이전과 3·4위 결정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정말 선수들 모두 죽을 만큼 어려운 과정들을 겪고 베이징에 입성했고 또 다시 죽기 직전까지의 한계를 극복해내며 감격의 동메달을 목에 걸었어요.
―올림픽대회 도중 <무한도전>팀과도 같이 해설을 했어요. 정형돈, 노홍철 씨였는데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무한도전이 합류했을 때 우리 선수들이 경기를 너무 잘해줬어요. 그래서 해설도 편했고 중계석 분위기가 좋아 매끄럽게 진행된 것 같아요. 그 전에 추성훈 씨가 유도 해설을 했었는데 한국 말도 서투시고 캐스터나 해설위원이 말을 잘 안 걸어줘 몇 마디 못하고 경기가 끝나는 걸 직접 지켜봤거든요. 그래서 정형돈 씨나 노홍철 씨한테는 제가 막 말을 걸었어요.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객원 해설위원의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잖아요.
임오경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96년 애틀랜타, 그리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임신 초기라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다)까지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며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 처음 지켜본 베이징올림픽은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할 올림픽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임 감독은 해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못을 박는다. MBC로부터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해설을 맡아달라는 비공식 제의를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는 후문. 더이상 가슴 졸이며 경기를 중계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독 핸드볼은 남자팀보다 여자팀이 더 많은 관심과 화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자 핸드볼에는 사연이 많잖아요. 아줌마들이 주축을 이뤄 팀을 이끌고 있고 유럽의 덩치 큰 선수들과 맞붙어 쓰러지고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고 부딪히고…. 경기만 있는 게 아니라 눈물과 감동이 있고 그래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고, 특히 그러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따고 은메달, 동메달도 획득하고요.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강인한 힘을 보여준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많이들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대학(한체대) 졸업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잖아요. 히로시마의 메이플 레즈팀이 창단되면서 선수로 뛰다가 감독이 됐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면서요?
▲일본 생활만 14년을 했어요. 원래 그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는데 있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더라고요. 제가 몇 살 때 감독이 된 줄 아세요? 만 스물네 살 때입니다. 일본에서 선수로 뛴 지 2년 만에 감독 제의를 받았어요. 결국 플레잉 감독, 즉 선수로 뛰면서 감독 생활을 겸임한 거죠.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었고 그런 험난한 과정을 통해 저와 팀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나이도 어린 데다 한국 사람한테 감독 자리를 제의했을 때는 팀에서도 어떤 생각이 있었겠죠. 그걸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오뚝이 인형을 사다 놓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어요.
―그래도 1996년부터 플레잉 감독으로 팀을 이끌면서 정규리그에서 8차례나 정상에 올랐어요. 올해 일본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귀국했는데 메이플 레즈팀에서 안 보내주려고 했다면서요?
▲임오경이란 사람이 일본에서만 있다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뭔가 한국의 후배들을 위해 보탬이 되고 싶은데 그런 기회가 없다보니까 일본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죠. 처음 1~2년만 힘들었지, 그 후론 선수들이 잘 따라와서 별 어려움 없이 팀을 이끌 수 있었어요. 구단주나 구단 관계자들도 제 능력을 높이 평가해줬고요. 그런 가운데 서울시청에서 핸드볼팀을 창단한다며 러브콜을 보냈어요. 당연히 소속팀에선 안 보내 주려고 했었죠. 며칠 얘기가 오고가는 중에 구단주가 절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신처럼 능력 있는 사람을 한국에서 안 부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더 있어 달라고 붙잡고 싶지만 이젠 우리가 당신을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라고요. 그 말 들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임오경 감독은 14년간의 히로시마 생활 중에 배드민턴 국가대표 출신의 박성우 씨와 결혼해 딸 세민(9)이를 낳았다.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코치 겸 주니어대표 감독을 맡고 있는 남편과 일본에서도 떨어져 생활하다보니 딸을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임 감독의 몫이었다. 그는 출산한 지 2주 후부터 윗몸일으키기를 하며 운동을 시작했고 훈련에 참가할 때는 갓난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체육관 한쪽에 놓고 수시로 우유와 기저귀를 갈아주며 정말 ‘독하게’ 선수와 감독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그렇게 키운 딸이 어느새 아홉 살이 돼 엄마의 인터뷰를 지켜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임영철 감독과는 오랜 인연을 맺으셨죠? 대학 때부터 만나셨다면서요?
▲그렇죠.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뵙고 지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은 겉으론 무섭고 사나워 보여도 속은 절대 그렇지 않으세요. 어찌 보면 감독님 능력 때문에 여자 핸드볼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해외파 선수들, 특히 아줌마들은 대표팀 합류하는 걸 무척 어려워해요. 솔직히 싫어요. 연금도 이미 ‘만땅’(100만 원) 돼서 메달을 따도 연금으로 포함되질 않아요. 오히려 한국 나오는 게 더 손해를 봐요. 쓰는 게 많으니까. 그런데도 임영철 감독님은 끈질기게 설득 작업에 나서요. 저 또한 일본에 있으면서 소속팀을 두고 대표팀에 합류하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하지만 감독님의 끈질김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요. 해외파 선수들, 아줌마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분은 임 감독님밖에 없어요. 아마 다른 분이었다면 아무리 전활 하셔도 안 들어왔을 거예요.
―지도자 생활하면서 이전 선수 때 만난 지도자들의 스타일이 많이 참고가 됐을 거예요.
▲전 사람 차별하는 거 안 좋아해요. 태극마크를 단 선수든, 그렇지 못한 선수든,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만약 훈련 중에 제가 가르친 대로 못 따라오는 선수가 있다고 쳐요. 그럼 얼마나 밉고 속상한대요. 그래도 운동 끝나고 한두 시간 지나면 전 그 선수에게 일부러 다가가서 장난치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그래요. 인간적인 차별이 싫어서 그렇게 노력하는데 사실 굉장히 힘든 ‘몸짓’이랍니다.
―서울시청이 창단팀이다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애로 사항이 있을 것 같아요.
▲한두 가지가 아니죠. 가장 그런 게 전용 훈련장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돈에 대한 지원, 먹는 것도 그렇구요. 선수들이 다른 걱정 안 하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본은 선수들이 모두 직장인들이거든요. 회사 일 마치고 오후에 핸드볼 훈련하러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데 우린 그런 시스템이 안 돼 있잖아요. 핸드볼이 국민들에게 받는 인기만큼 정책 지원이나 시설 확충 등은 한참 모자라요. 그게 많이 안타까워요.
임오경 감독은 아직 서울시청팀을 이끌고 데뷔전을 치르지 못했다. 선수 구성이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고 섣불리 대회에 참가했다가 망신만 살까봐 제대로 된 팀을 만들어 놓은 후에 국내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하던 중 식사를 하는 선수들을 향해 “너희들, 술 한잔씩 해야지?”하고선 술을 주문하는 임 감독. 선수들과 격의 없이 살갑게 지내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였다. 그러나 코트에만 서면 돌변하는 성격 때문에 선수들이 처음엔 다소 버거워했다고 고백한다. 인터뷰 말미에 대표팀 감독에 대한 의향을 물었다.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쳤다.
“많이들 궁금해 하시는데 아직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대표팀 지도자는 최고의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자리예요. 전 아직 그런 인재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욕먹으면서 생활하고 싶지도 않고. 태릉에 불암산이 존재하는 한 대표팀 지도자는 힘들 거예요(웃음).”
대표팀 시절, 불암산에서 산악 훈련하며 혼절했던 경험 때문인지 임 감독은 불암산이란 명칭 자체에 몸서리를 치며 웃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