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리그로 꼽히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일곱 차례나 득점왕에 올랐던 윤경신은 독일 언론에서 ‘분데스리가의 마이클 조던’으로 불렸을 만큼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자랑했다. 최현호는 독일과 덴마크리그 등을 거치며 상승세를 나타냈지만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은퇴 후 지상파 오락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하다가 혹독한 연기 수업 끝에 영화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는 중이다.
203cm(윤경신)와 193cm(최현호)의 만남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워낙 절친한 사이라 종종 서로에 대한 칭찬보다는 ‘험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지난 17일 ‘취중토크’ 형식으로 진행된 전현직 핸드볼 스타의 ‘만담’을 정리해본다.
윤경신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그의 화려한 활약상을 접하며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결국 그를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 만나게 됐다. 소박함과 넉넉함, 그리고 남다른 유머 감각 속에 담긴 묘한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던 윤경신은 친동생 이상으로 아끼는 최현호와 맥주를 마시며 많은 얘기들을 풀어냈다.
최현호를 다시 만난 건 5년 만이었다. 2003년 덴마크에서 활동하고 있을 당시 그때도 ‘취중토크’를 벌였는데 이젠 연기자 최현호로 다시 술자리에서 만나게 됐다. 이전보다 더 건강한 외모와 훨씬 더 매력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최현호는 윤경신이 “언어 학원에 다녔냐?”라고 놀라워할 만큼 입담이 대단했다.
최현호(최): 형, 축하해요. 데뷔 무대에서부터 우승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하여튼 지난 번 다이소배 전국핸드볼실업대회에서 두산이 우승한 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윤경신(윤): 처음부터 왠 립 서비스냐? 일단 고맙다. 내가 뭐 한 거 있나. 선수들이 잘해 준 거지.
최: 어때요? 13년 만에 한국에서 뛰는 기분이?
윤: 사실 기대와 걱정이 반반이었어. 대학 졸업하고 바로 외국으로 나갔기 때문에 한국에서 실업팀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잖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구. 그런데 이전과 변하지 않는 거라면 핸드볼에 대한 무관심이네. 다이소배대회가 전남 무안에서 열렸는데 관중들 진짜 적더라. 체육관 시설도 열악하구.
최: 핸드볼 인기는 반짝인 것 같아요. 올림픽 때만. 그런데 독일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다가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가 뭐예요?
윤: 다 알면서 물어보냐(웃음). 항상 마음속에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 시즌 마치고 휴가 받아서 1년에 한 번 정도 들어왔다가 나갈 때면 너무 힘들었거든. 그리고 내가 선수로 뛸 수 있을 때, 힘 떨어지고 볼품 없을 때가 아니라 내가 잘할 수 있을 때 반드시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구. 가족들도 점점 힘들어 하는 것 같고.
최: 형, 그거 아세요? 저한테 형은 영웅 같은 존재였어요. 엄청난 ‘산’이나 마찬가지였죠. 그 산이 너무 높아서 넘지 못했구요. 정말 형을 쫓아가고 싶었는데 너무 차이가 많이 나니까 감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구요. 속으로 질투도 많이 했어요.
윤: 내가 무슨 그런 존재가 된다고 그래. 너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는데 너무 빨리 은퇴를 한 게 아닌가 싶어. 물론 이젠 되돌릴 수 없지만 말야. 그리고 네가 독일에 있을 때 좀 더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굼머스바흐를 떠나며 많이 서운했을 텐데.
최: 아뇨. 제가 더 죄송했죠. 팀에선 윤경신을 보고 절 데려간 건데 제가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잖아요. 당시 전 항상 형이랑 비교됐던 것 같아요. 형은 너무 잘하는데 전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니까요. 독일을 떠나 덴마크 비복팀으로 이적했을 때는 하루하루가 우울함의 극치를 이뤘어요. 지독한 외로움에 마음의 병까지 얻었으니깐요.
윤: 나도 마음 아팠다. 친동생을 떠나 보낸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네가 은퇴하겠다고, 그것도 은퇴 후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진짜 걱정 많이 했다. 행여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운동만 했던 사람이라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지.
최: 사실 맘 고생 많이 했어요. 시행착오도 겪었구요. 그래도 형 밑에서 운동했던 게 도움은 되더라구요. 형이 워낙 쓴소리를 많이 해서 웬만한 상황은 견딜 수 있던데요(웃음)?
윤: 야, 그거 욕이지(웃음)? 솔직히 난 아직도 연기자 최현호가 좀 낯설어. 그래도 고마운 게 네가 날 만나면 연예인 티를 안 낸다는 거야. 사실 그런 내색하면 바로 죽었겠지만(웃음). 넌 항상 공손하고 예의가 바르잖아. 너무 착해서 걱정이 될 정도로. 물론 이런 착한 면면들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최: 형, 전 독일에서 형수랑 같이 고스톱 치고 놀았던 기억이 너무 생생해요. 훈련 마치고 할 일 없을 때 형 집으로 놀러가서 밥 먹고 ‘디저트’로 고스톱을 쳤는데 제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거 아세요? 거의 형네 부부는 ‘부부 도박단’ 수준이었다니까.
윤: 부부 도박단은 무슨? 네가 못한 거지. 맞아 참 재밌었어. 동전던지기 놀이도 했었잖아. 어린 애들 하는 놀이를 키 큰 사람들이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웃기냐. 참, 현호야! 너 멜라니 기억나?
최: 어휴,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어찌나 저한테 들이대던지. 형도 멜라니랑 연결시켜주려고 하셨잖아요.
▲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닮은 윤경신(왼쪽) 최현호가 건배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최: 멜라니뿐만 아니라 덴마크에서도 여러 여성분들이 대시를 해왔어요. 그래도 꿈쩍도 하지 않았죠. 이상하게 외국 여성한테는 관심이 안가더라구요. 전 한국 여성이 너무 좋아요. 단순한 데이트라도 외국 여자랑은 싫더라구요.
최현호는 베이징올림픽 동안에 윤경신이 오른손 새끼손가락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란 심정으로 윤경신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왼손잡이인 윤경신이 “오른손이니까 괜찮다”라고 안심을 시키자, “오른손 왼손이 어딨어? 자기 몸을 다쳐놓고”라며 화를 냈다고. 윤경신은 후배의 걱정을 접하며 새삼 마음이 훈훈해졌단다. 비록 핸드볼에선 손을 뗐지만 핸드볼을 사랑하고 선배를 챙기는 최현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경신의 오른 새끼손가락은 여전히 치료를 못하고 방치 상태였다. 전국체전 전까진 수술도 못한다고 한다.
윤: 현호야, 연기자가 여러 가지로 많은 걸 준비해야 하고 기다림, 끈기, 이런 것두 필요하다던데 힘들지 않아?
최: 처음엔 ‘핸드볼 스타’ ‘국가대표 출신의 핸드볼 선수’ 뭐 이런 꼬리표가 방송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런 수식어가 종종 부담도 되더라구요. 운동선수 출신에 대한 편견도 있었으니까요. 더욱이 전 오락프로그램에만 출연하는 게 싫었거든요. 방송보다 연기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이전 소속사에선 방송 출연만 강행했어요. 심지어 영화 캐스팅을 취소하기도 했구요. 속이 많이 상했지만 지금 형들(매니저)을 만나 다시 준비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곧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윤: 지난 번 네가 영화 감독님을 소개해줬잖아. 느낌이 새롭더라. 네 모습을 보니까.
최: 하하. 사실 그 감독님이 저한테 키가 너무 크다며 계속 2미터라고 주장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진정한 2미터를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 뒤 형을 모시고 간 거죠. 형을 보신 다음부턴 저한테 키 얘기 안 하세요(웃음).
윤: 내가 전시용이었네? 하하
최: 운동할 땐 키 큰 게 도움이 됐는데 연기할 땐 별로에요. 여자 연기자들과 키 차이가 많이 나니까 카메라 앵글 잡기가 어렵나 봐요.
윤: 독일서 보니까 종종 네가 연루된(?) 스캔들 기사도 나오더라. 난 여자 연예인 한번 만나 보는 게 소원이야.
최: 어휴, 그런 얘긴 하지 마세요.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싫어요. 연기자 최현호로만 알려졌음 좋겠어요.
윤: 난 운동선수의 박경림인가봐. 어떤 사람을 만나도 소문이 안 나요^^.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볼 일이야.
최: 그만 좀 하시죠^^. 형, 전 항상 섭섭했던 게 형이 외국에서 이룬 기록과 성적들이 우리나라에선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는 부분이에요. 독일에선 형 모르면 간첩인데, 한 리그에서 득점왕을 일곱 번이나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정말 대단한 기록이잖아요.
윤: 뭐 어쩔 수 없지. 나름 해외파였는데 철저히 외면당한 부분도 있었어. 워낙 핸드볼이 인기가 없으니까 한국에선. 영화 때문에 여자핸드볼이 인기를 얻은 반면에 남자핸드볼은 오히려 더 위축되고 소외받는 느낌이야.
최: 그렇죠? 전 형이 한국에서 뛴다고 했을 때 너무 기뻤어요. 외면받았던 남자핸드볼의 인기가 조금씩 살아날 것 같아서. 형의 플레이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잖아요.
윤: 그게 나 혼자 잘한다고 될 일인가? 많은 노력들이 필요한데 어렵겠지만 노력이라도 해봐야지. 소원이라면 많은 관중들 앞에서 핸드볼 경기를 해보는 거야. 독일은 경기 때마다 만원 관중을 이뤘거든.
최: 전 형이 영원한 한국의 핸드볼 영웅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지도자로도 좋은 모습 보여주실 거란 기대도 있구요. 핸드볼 윤경신은 선수든 지도자든 영원하다는 걸 꼭 증명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처럼 절 동생으로 예뻐해주시구요.
윤: 아, 미치겠다. 너 무슨 언어학원 다니냐? 말 진짜 잘한다. 난 계속 버벅대고 있는데. 하여튼 고맙다. 네 응원 덕분에 더 힘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네가 연기자로 성공하길 바래. 배는 좀 아프겠지만(웃음) 인기 스타도 되고. 그래서 내가 네 형이란 사실을 자랑 좀 했으면 좋겠다. 연기자 최현호 파이팅이닷!
최: 이 대목에서 건배! 하여튼 전 형이 가까이 있어서 너무 든든해요. 핸드볼에선 형을 따라 잡을 수 없었지만 연기자로는 반드시 인정받을 게요.
인터뷰라기보단 유쾌한 저녁 식사 자리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남자들의 우정, 사랑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화려한 선수 생활, 부와 명예를 떨치고 한국 실업팀에서 선수로 뛰는 윤경신의 선택도 대단했고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진정한 연기자로 발돋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최현호도 멋져 보였다. 다른 길, 다른 인생을 살지만 결국 한마음으로 모이는 두 사람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 기자도 건배~!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