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표는 정상 이미 세 차례나 우승 경험이 있는 전창진 감독. 그러나 우승은 여전히 그한테 갈증나는 사막과 같다고.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오리온스 전까지 7연승을 내달린 원주 동부의 ‘치악산 호랑이’ 전창진 감독은 비록 팀은 1위를 고수하고 있지만 몸과 마음은 거의 만신창이 수준이다. 소속팀 선수들 연봉의 반을 차지하는 ‘거물’ 김주성이 쓰러진 것도 속이 쓰리고 시즌 전부터 힘들었던 체력이 지금은 거의 소진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심리치료를 모색했을까.
이미 우승도 세 번이나 해봤고 지도력도 인정받은 상태라 설렁설렁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을 것 같은데 전 감독 사전에 ‘대충’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의사를 대여섯 명이나 만나봤어요. 검사도 다양하게 해봤는데 이상이 없다는 거야. 살짝 우울증이 오더라고. 그래서 찾아간 곳이 정신과 상담이야. 이전에는 내가 카운슬러가 돼서 선수들 상담을 했지만 내가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니깐. 지금도 경기 내내 서 있는 게 힘들어. 감독이 물렁해지다보니 팀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초반에 우리가 힘들었던 것도 이런 부분이 작용됐기 때문이야. 경기는 기 싸움인데 이미 싸울 기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중간에 경기를 접거나 구단에 얘기해서 아예 쉴까도 생각했는데 조금씩 몸이 좋아지더라구.”
감독의 몸이 좋아지면서 팀 성적도 상승세로 올라섰다고 하니 이쯤되면 감독과 선수가 일심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지난 시즌 감격에 겨운 우승을 맛본 뒤 올 시즌을 앞두고 악명 높기로 소문난 태백 극기훈련을 통해 팀 전열을 재정비했다는 전 감독. 이미 세 차례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이라 우승에 대해 여유도 있을 법 하지만 여전히 우승은 그한테 갈증 나는 사막과도 같은 존재다.
“우승했다고 해서 다음 번 목표를 플레이오프 4강이라고 잡을 순 없잖아요. 여전히 목표는 우승이고 우승을 향해 가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들로 참 힘드네.”
그 복병들 중 가장 큰 복병은 김주성 부상이다. 김주성은 시즌 초 이전과 같은 플레이가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지난 시즌 후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했고 대표팀에 발탁돼 뛰다가 무릎을 다쳐오는 등 훈련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 결과가 시즌 초 고스란히 나타났지만 워낙 성실한 선수라 남다른 노력 끝에 간신히 자신의 플레이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좀 할 만하다’싶을 때 왼쪽 발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한 것.
“정말 화가 났어요. 누구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그 상황이 화가 나더라구. 가까스로 몸 만들어 좀 뛸 만하니까 부상을 당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어요. 주성이 빠지니까 선수가 안 보이대. 정말 황당했지. 그래도 (윤)호영이가 열심히 해줘서 간신히 이기긴 했는데 정말 감독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악재 중 큰 악재였어요.”
전 감독은 마음 한 구석에 김주성에 대한 미안함이 한가득 자리해 있었다. 항간에서 ‘김주성 혹사 운운’하는 데 대한 마음의 빚이었다.
“주성이가 들어온 후 우승 한 번, 준우승, 그리고 또 우승, 이렇게 해봤어요. 신인 보강이 안 됐죠. 뛸 만한 선수는 맨날 6명밖에 없는 거야. 물론 선수를 키우는 몫이 감독의 능력이겠지만 농구는 워낙 예민한 운동이라 축구나 야구처럼 ‘연습생 신화’, 이런 게 잘 안 나와요. 그러다보니 주성이가 고생이 많았지. 경기를 하다 주성이가 힘들다고 빼달라는 신호를 보낸 적도 있었어요. 여유가 있을 땐 당연히 빼주겠지만 여유가 없을 땐 봐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어요. 몇 게임 놓치면 바로 뒤로 처지기 때문에 잠시도 한눈 팔 여유가 없거든. 그런 점에서 항상 주성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올시즌 처음 모습을 보인 새내기 윤호영이 김주성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직까진 부담을 덜어주긴커녕 초반 슬럼프로 인해 김주성을 더 힘들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전 감독은 윤호영이 조금씩 살아나면 김주성에 쏠린 과부하가 덜해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잃지 않았다.
▲ 2008년 4월 우승 장(왼쪽) | ||
전창진 감독은 오는 4월 말이면 동부와 계약 만료가 된다. 우승 경험이 많은 감독이다보니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소문이 무성하다. 한때 수도권의 한 팀으로 옮겨갈 것이란 소문도 파다했다. 전 감독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 ‘지금 이 시점에서’ 언급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선수들도 그런 소문을 들었나 봐요. 잠시 어수선하기도 했고 애들이 상처도 받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팀을 떠난다, 안 떠난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물론 프로에서 서로 원하는 부분이 맞아떨어진다면 움직일 수도 있는 거지만 그런 얘긴 시즌이 끝난 이후에 해도 돼요.”
전 감독은 솔직히 어떤 한 팀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단박에 거절했다고. 그런 말이 오가는 것 자체가 시즌 중에는 악재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걸 시즌 이후로 밀어놨고 자신 또한 재계약 여부를 당분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강조했다.
“난 항상 내 자리를 물려줄 준비가 돼 있어요. 허재 감독이 TG삼보에 있을 때도 내 후임은 허재라고 생각했었어요. 물론 구단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없는,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지금도 그래요. 감독급인 강(동희) 코치가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 잘해주리라 믿기 때문에 좋은 팀을 좋은 지도자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이 또한 전적으로 나 혼자하는 생각입니다.”
전 감독이 시즌 중에 가장 많이 통화하는 감독은 바로 고려대 선후배 사이인 서울SK 김진 감독이라고 한다. 그 외에 KCC 허재, 전자랜드 최희암 감독과도 호형호제 하는 관계다. 한때 삼성 안준호 감독과 불편한 사이라는 소문이 났었지만 시즌 전에 따로 만나 쌓였던 감정의 앙금들을 훌훌 털어 버렸다고 한다. 코트에서 ‘적’으로 만나는 사령탑들과 끈끈한 인간 관계를 이어가는 비결은 전 감독만이 갖고 있는 넉넉한 친근감 덕분이다. 얼마 전에 농구계를 후끈 달궜던 허재 감독과 서장훈의 트레이드 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좀 안타까웠죠. 언론이 앞선 부분도 있었고요. 허 감독이 남몰래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서)장훈이는 선수로서 뛰고자 하는 욕심을 내세우지만 감독은 선수단 전체를 봐야 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팀 내부에서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면서 너무 시끄럽게 됐어요. 둘 다 유명한 스타플레이어들이잖아요. 그만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다는 거죠.”
용병 다루기에 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 감독. 아무리 날고 기는 용병이라고 해도 전 감독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만다. 남다른 노하우라도 있는 걸까.
“난 용병을 볼 때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을 중요시해요. 감독 말을 잘 듣고 잘 따라올 만한 선수인지 아닌지를 눈여겨보죠. 이번에 화이트란 친구가 새로 들어와선 무던히 속을 썩였어요. 내가 아팠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요. 오죽했으면 코치들이 화이트를 미국으로 보내버리자고 했을까. 그러나 일단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늘 잔소리를 달고 살았지.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댔는데 하루는 화이트가 성경책을 갖고 내 방을 찾아왔더라구요. 하나님 말씀 중에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절대로 감독을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비록 화도 많이 내고 잔소리도 심하지만 감독을 절대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데 감동이 되더라구. 화이트도 스트레스가 심했을 텐데 그걸 다 이겨냈어요. 그리곤 조금씩 팀에 적응되는 모습을 보여줬죠. 화이트가 어느 정도 올라오니까 내가 맛이 가버려서 탈이지만(웃음).”
인터뷰 말미에 한번쯤은 꼭 만나고 싶은 다른 종목의 감독이 누군지에 대해 질문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전 감독이 어렵게 꺼낸 이름은 이미 물러난 프로축구 성남 일화의 김학범 전 감독이다.
“항상 공부 많이 하고 노력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김 감독 친구 분이랑 내가 잘 알아서 한 번 만날 뻔했다가 무산됐지. 결국 만나지 못했는데 언젠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시겠죠. 그때는 꼭 만나뵈려구요.”
전 감독과 인터뷰한 다음날 아침, 전화가 걸려왔다. 잘 내려갔느냐는 인사와 함께 이런 우스갯소리를 곁들였다.
“이 기자, 내가 정신과 치료받는다고 쓰면 사람들이 ‘전창진, 맛 갔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그냥 치료보단 상담으로 표현하는 게 어때?”
그래서 헤드라인으로 ‘전창진이 정신과를 찾는 이유는?’이라고 뽑을 거라며 눙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