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일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추후를 도모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적지 않다. 한 친박계 인사가 “원 스텝 백(one step back)이 필요하다면 열 번이라도 해야지. 차기(대선)를 위한 거점 확보를 위해선 계륵 같은 자리는 몇 번이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6월 2일 열린 새누리당 전국위원회에 참석한 정진석 원내대표와 서청원 원유철 의원(왼쪽부터)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6월 8일 오전 10시. 원유철 전 원내대표가 공부모임으로 발족한 국가미래전략포럼(알파포럼) 발족식에서 친박계 서청원 의원이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서 의원은 디너쇼 만담가처럼 무대를 돌아다니며 연설하는 것이 특기지만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발언까지 합해 그는 이런 말을 청중에게 연설했다.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 새누리당은 큰 통으로 크게 미래를 보면서 야당에서 국회의장 달라면 줘버리세요. 8선 선배로서 이 말씀 드립니다. 제가 국회의장 욕심 갖는다고 그러는데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저는 출마 안 합니다. 대신 서청원이는 표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 5선 중에 국회의장 출마하겠다고 한다면 저는 그 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하겠습니다. 밤새 고민해서 말씀드립니다. 미안합니다. 잔치에 와서 이런 소리를 해서.“ (서 의원이 말한 ‘5선’은 정갑윤 의원을 지칭한다. 정 의원은 서 의원이 국회의장직에 관심이 없다 했다가 돌연 태도를 바꾼 것에 마음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날 서 의원의 ‘국회의장 불출마’ 선언 직후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은 더불어민주당 몫으로 돌아갔다. 18개 상임위원장의 정당별 배분도 오후 6시 이전에 완료되면서 순식간에 원 구성이 정리됐다. 국회 개원(5월 30일) 이후 10일간이나 원 구성 협상에 진척이 없었던 데에는 서 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진석 원내대표도 기자들과 만나 “서 의원이 아침에 용단을 내려주셔서 교착 상태에 빠졌던 원 구성 협상에 물꼬를 터주셨다. 일하겠습니다. 열심히”라고 했을 정도다. 만약 당일 서 의원의 용단이 없었다면 원 구성 협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다는 원내사령탑의 자백(?)으로도 읽힌다.
# 다음날인 9일 오전 국회 본청 새누리당 의원총회장. 서 의원의 의장 불출마로 새누리당몫 국회부의장에 비박계(친이계에 가까움) 5선의 심재철 의원과 범친박계로 분류되는 김정훈 의원(4선)이 나섰고, 정견 발표를 하고 있었다. 김 의원은 자당 의원들 사진에 해당 의원들의 대표 공약을 박은 맞춤형 명함을 일일이 돌리며 “국회부의장이 되면 공약들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쓰겠다”라고 읍소했다. 한 의원은 ‘김 의원 정성이 대단하다’고 했다.
양자의 표 대결 결과가 나왔을 경우 패한 쪽의 상심에 대비해 이날 표는 과반이 넘는 순간 개표를 중단키로 했고, 심 의원이 먼저 과반을 넘겼다. 122명 의원 중 친박계가 70여 명의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김 의원을 몰아준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어야 했다. 그래서 다수는 선수가 적더라도 김 의원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다. 특히 심 의원은 당내에서 몇 남지 않은 친이계 비주류이고 동료 의원들과의 접촉도 거의 없는 인사였다. 정견발표도 애드립을 섞어 김 의원이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영남권 신공항을 둘러싸고 친박계가 절대다수인 TK(대구·경북)이 결집해 부산의 김 의원 비토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또 보수적인 의원들의 특성상 선수 위주의 투표를 진행했다는 말도 나왔다. 심 의원이 지난 19대 국회 후반기에 당내 부의장 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재수를 한 탓에 이에 대한 동정표가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적지 않았다.
친박계 맏형의 의장 불출마는 본인의 의지였을까. 범친박계의 부의장 경선 패배는 소속 의원들의 독자적 판단이었을까. 정치권이 이틀 연속 발생한 친박계의 희생(?)과 패배를 눈여겨보는 것은 당직이 아닌 ‘국회직’이란 점, 그리고 그 시기다. 앞서의 인사는 이런 말을 이어 들려줬다.
“총선 참패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국회의장도 부의장도 친박이 하겠다고 덤비면 여론이 좋게 돌아가겠는가. 가뜩이나 의장 자리 때문에 원 구성 협상 자체에 진전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물론 서 의원이 의장석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친박계는 다수가 잘 알고 있다. 불출마 용단은 그로선 큰 결정이었다. 또 친박계가 결집했다면 김 의원의 부의장 당선은 불 보듯 뻔했는데 아니었다. 우연의 일치? 이 두 사건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지 않았겠나.”
국가 의전 서열 2위의 국회의장을 두고 ‘한다, 안 한다’하는 것은 개인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또 122명 중 초선 45명의 새누리당에서 첫 경선이 실시됐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초선에게 일종의 ‘오더(order)’ 없이 투표가 진행될 수 있었겠느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친박계 핵심 중진 의원은 사석에서 만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자의 이미지”라고도 했다.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는 모습이 이어지고 이만하면 친박도 할 만큼 했다는 평가가 나와야 한다는 얘기였다. 또 새누리당 성향인 무소속 의원 7명 중 유승민·윤상현 의원을 뺀 5명만 ‘선별적으로’ 복당시키자는 말이 쑥 들어간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친박계가 자꾸 유 의원 비토에 나서는 모습이 “아직 정신 못 차렸다”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어 친박계가 그 부분까지도 수용했다는 말이 들린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다수는 “선별 복당이 아닌 일괄 복당 쪽으로 기류가 잡히고 있다”고 귀띔한다.
결국 친박계가 목적지로 삼고 있는 것은 ‘당권’으로 모아진다. 친박계 핵심인 홍문종 의원은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친박계끼리 당 대표 후보를 정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저도 책임 있는 당원 중 한 사람이고, 4선까지 됐다. 대선에 대비한 여러 정책 대안과 복안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호남에서 재선이 된 이정현 의원, 타천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까지 친박계의 당권도전파가 수를 늘리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지금은 무소속 상태인 3선의 윤상현 의원도 슬슬 몸을 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의원은 최근 30명 규모의 국회의원 연구모임 발족을 위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새누리당 친박계 다수를 모았다는 전언도 있다. 친박계 한 의원은 “복당 전 상태이기 때문에 참석자로 바로 사인해주긴 어려웠지만 복당하는 순간 ‘복당 선물’로 연구모임 참여 가능성을 연 동료들이 꽤 된다”고 전했다.
만약 새누리당 비상대책위가 당권과 대권을 분리한 규정을 손질키로 하면 이들 당권 도전파들의 대권 도전도 가능해진다. 또 ‘1인2표제’로 대표최고위원과 차점자 최고위원을 뽑는 현재 규정이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어 대표최고위원을 뽑고 최고위원을 따로 뽑게 되면 대표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된다. 절대 권력의 당 대표가 대권으로 직행할 수 있도록 친박계가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