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어로즈와 두산의 경기를 기록하고 있는 김제원 팀장(오른쪽)과 한인희 위원.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지난달 26일 오후, 두산 베어스와 히어로즈의 경기가 있는 서울 잠실 야구장을 찾았다. 방송실 옆에 자리한 기록위원실 앞에 서자 문 앞에 붙어 있는 흥미로운 문구가 보인다. 구단 관계자, 감독, 코치, 선수에게 해당되는 주의 문구였다. 심판위원 및 기록위원을 폭행했을 때는 제재금 300만 원 이하나 출장 정지 10경기 이하, 그리고 판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을 땐 폭행보다 더한 제재금 500만 원 이하에 해당하는 처벌을 내린다는 규정이다. 재미있는 점은 종료 후나 경기 중에 기록위원실과 심판위원실을 찾아와서 사적인 환담을 나누거나 친목적인 언행을 하였을 때도 제재금 50만 원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는 것.
이에 대해 고교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김제원 1군 팀장은 “기록원 규약상 구단 관계자 및 선수와 우호적으로 지내면 안 되기 때문에 선수시절을 함께했던 야구 관계자를 만나도 인사만 하는 정도”라며 “입사 전에는 고교시절 야구팀 은사가 코치로 있었던 OB 베어스를 응원했는데 지금은 그저 빨리 경기가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엔 없다”고 말한다. 다른 기록위원들 역시 “야구가 좋아서 일을 시작했지만 현재 응원하는 팀은 따로 없다”며 웃는다.
구단 선수 및 관계자들이 폭행이나 판정 항의를 하는 경우는 자주 있을까. 원칙상 기록원들은 심판판정을 번복할 수 없기 때문에 기록원과 구단의 불화는 그렇게 많지 않단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전광판에 기록을 올리는 오퍼레이터와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전달이 잘 되지 않아 가끔 실수를 하는 일이 있다고. 김 팀장은 “에러 판정을 했는데 전광판에 안타로 표시될 때가 있다”며 “선수들은 판정 한 번에 연봉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왜 수정을 하느냐’며 항의하기도 하고, 감독들도 선수 독려 차원에서 오버를 할 때도 있지만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야구기록원이란 직업을 모르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대체 어떤 이들이 야구기록원으로 일하며 그들의 생활은 어떨까. 윤병웅 실장은 “매년 2월, 3일 동안 기록 강습회를 시행한다. 빈자리가 생길 경우 강습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던 사람들을 직원으로 뽑는다”며 “1차가 강습회 성적이라면 2차는 스프링캠프의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시범경기 1주일 전 스프링캠프에 가서 수습 기록원들이 판정도 해보고 5박 6일 동안 함께 지내며 기록원에 알맞은 성품, 생활습성 등을 평가받게 된다는 것. 그런데 알려진 바와 달리 공식기록원 14명 중 전직 교사, 의대생 등 다양한 직군은 없다.
윤 실장은 “관심을 모았던 의대생은 강습회 수강만 했고, 교사 자격증을 가진 이는 있다”며 “대부분 대졸자, 대졸예정자들이 첫 직장으로 선택해 들어오기 때문에 이색경력자는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규정은 아니지만 모두들 야구 마니아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김 팀장은 고교 야구선수생활을 접고 단국대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에서도 아마추어 야구동아리로 활동하다 결국 91년 야구기록원이 됐으며 각각 2003년, 2006년에 입사한 한인희 위원과 김영성 위원도 기계학을 전공했음에도 ‘야구가 좋아’ 기록원이 됐다.
▲ 왼쪽부터 김영성 위원, 김제원 1군 팀장, 한인희 위원. | ||
야구기록원의 생활도 선수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1년 동안 14명이 8개 구단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지방에 가는 일이 잦다. 일주일에 하루, 월요일이 휴일이지만 그마저도 화요일 경기가 지방이면 월요일에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 한 위원은 “지역마다 가는 숙소가 정해져 있다”며 “할인도 해주고, 4시 반 정도에 경기장에 가는 걸 알기 때문에 12시 체크아웃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편의를 봐준다”고 말한다.
지방출장이야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가 됐지만 가족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각종 경조사는 물론이고, 가족의 모든 일정을 프로야구 비시즌이나 유일한 휴일인 월요일에 맞춰야 하기 때문. 김 팀장은 “유일한 여자 기록원이었던 분도 지방출장이 많은 직업적 성격 탓에 결국 그만뒀다”며 “물론 가족상을 당하면 교체를 하지만 기록원 중 한 명은 경기 당일 친척상 소식을 듣고도 기록원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했다. 딱 한 번 사고도 있었다. 지방 이동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기록원이 있었던 것. 다행히 경기 하루 전이라 윤 실장이 투입됐다. 윤 실장은 “1군 4게임에 8명, 2군 5게임 5명으로 13명이면 된다”며 “두 명이 다치면 큰일이다”라고 말한다. “여자친구가 아플 때 가장 미안하다”는 한 위원은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이 우리에겐 선물이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힘든 점은 ‘별 내용도 없는 게임’ 기록을 할 때다. 김 팀장은 “선수들도 에러 많고 포볼 많은 게임 싫어하듯 별 내용 없는 게임이나 무승부가 가장 힘들다”며 “16회 연장까지 가 화장실에 못 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승부보단 끝장승부가 낫다”고 말한다.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 끝장승부가 차라리 좋다지만 연장경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특히 김 팀장은 요즘 들어 ‘연장경기 전담반’으로 불릴 정도다. 2000년, 승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올스타전마저 전무후무한 연장 15회를 할 때 현장에 있었고, 지난해 9월 3일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무제한 18회 경기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 팀장은 “올해 LG 트윈스와 히어로즈의 최다 득점 최다 안타 경기를 기록했는데 그게 전주곡이었는지 바로 다음 경기인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 경기가 5시간 51분 최장 기록을 깨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1군 경기 30게임을 조금 넘긴 한 위원은 무박 3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 위원은 “LG 트윈스와 히어로즈 경기 후 새벽 1시에 식사하고 집에 가서 씻고 하니까 해가 떴다”며 “잔뜩 긴장한 터라 거의 잠을 못 자고 오후에 인천으로 갔는데 또 12회 연장을 했다”고 당시 일을 회상했다. 이런 까닭에 요즘 기록원들 사이에서는 LG 트윈스 경기가 있는 날은 “LG니까 밥 한 공기 더 먹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는 후문이다.
경기 시작하면 눈빛 달라져
1800게임 이상을 기록해 온 김 팀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이승엽의 56호 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던 때라 이례적으로 게임 도중에 마운드에서 인터뷰가 이뤄지기도 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단다. 최고참인 윤 실장은 “송진우의 200승, 박재홍의 최초 30홈런 30도루, 박경완의 4연타석 4홈런 기록 등 선수들의 대기록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했다.
야구기록원들이 기록해보고 싶은 게임은 바로 퍼펙트게임. 김 팀장은 “아직까지 퍼펙트게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며 “프로야구 28년 역사에 이가 하나 빠진 꼴이니 다른 기록원이 하더라도 퍼펙트게임이 꼭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다.
인터뷰가 끝난 후 ‘배가 부르면 속이 더부룩해질까봐’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기록원들이 자리에 앉자 곧 경기가 시작됐다. 말 한마디 없는 정적 속에 “스윙 삼진”, “파울”이라는 단어만 간간이 들려온다. 잠실야구장 방송실 옆에 자리한 야구기록원 두 명은 허리를 곧추세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홈베이스 쪽을 노려보고 있다. 경기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면 음료수를 마시기도 부담이 된다는 기록원들, 매 순간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주인공들이다.
문다영 객원기자 dy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