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월드컵 최종예선전에서 박지성. 그가 뛰기 시작하면 상대 수비수 서너 명이 따라붙는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 이근호 | ||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9년 전. 대표팀 식사 시간은 군대처럼 조용했고 선수들은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전투적인 이미지가 강한 ‘진돗개 감독’을 무서워했다.
허 감독은 지금도 다가서기 쉬운 사람은 아니다. 승부욕은 여전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는 많이 바뀌었다. 마음을 비우고 귀를 열었기 때문이다.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의 감격에 젖었던 지난 8일 오전. 허 감독은 오전훈련을 지도한 뒤 선수들에게 밤 10시까지 외출을 허락했다.
예전의 허 감독을 떠올린다면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에게 외출을 허락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허 감독은 오랜 원정 끝에 답답해하는 선수들의 마음을 읽고 작지만 큰 배려를 했다.
2007년 12월 대표팀 지휘봉을 7년 만에 다시 잡은 허 감독이 처음부터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 건 아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허 감독은 여전히 허 감독이었다. 자신의 축구철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선 물러섬이 없었다.
허 감독은 대표팀이 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에서 부진한 탓에 자신의 지도력에 대한 비판여론이 불거지자 이를 참지 못했다. 대표팀 부진의 원인을 선수에게 돌리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며 불편한 심기도 그대로 보였다.
9년 전의 악몽이 재현되는가 싶던 순간 허 감독은 돌파구를 찾았다. 모든 걸 움켜쥐려 하지 않고 내려놓을 건 내려놓았다. 허심(虛心)과 자율(自律)로 팀을 이끌었고 져도 되는 경기와 놓쳐선 안 될 경기에 완급을 주며 탄력적으로 대표팀을 운영했다.
고집이 강하고 강한 훈련과 정신력을 강조하던 예전의 허 감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주위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선수와 눈높이를 맞추는 감독으로 변신했다. 경기 전 선발 멤버를 짤 때부터 코치진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정해성 코치나 김현태 GK 코치로부터 나름대로 선발 멤버를 받아본 뒤 3명이 모두 꼽은 선수는 무조건 선발로 내보내고 일치하지 않는 선수에 대해서는 코치진 의견을 반영했다. 선수 교체나 전술 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기성용(왼쪽 사진), 이청용(오른쪽 사진) | ||
당장의 성적을 위해서는 검증된 선수를 계속 기용하는 게 나았지만 허 감독은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해 모험을 선택했다. 9년 전 갖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지성과 이영표를 발굴해 한국축구에 이바지했듯이 안정환·설기현·김남일·이천수·송종국 등 노장선수들을 과감하게 빼고 K리그에서 꾸준하게 활약하는 젊은 선수들을 중용해 대들보 선수로 키웠다.
수혈된 젊은피 간의 호흡이 맞지 않은 탓에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허 감독은 우직하게 세대교체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2006년 독일월드컵에 나섰던 태극전사의 평균연령이 26.43세인데 반해 25.28세의 보다 젊은 팀으로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이라는 값진 열매를 따냈다.
허 감독이 아낀 핵심 젊은피는 이근호(24)·이청용(21)·기성용(20)이었다. 지난해 열린 UAE와의 최종예선 2차전부터 5경기 연속 선발출전한 공격수 이근호는 최종예선 6경기에서 3골을 터트리며 대표팀 간판공격수로 우뚝 섰다.
약관의 기성용은 대표팀의 중원사령관으로 성장했다. 북한과의 최종예선 1차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것을 포함해 A매치에서 3골을 작렬하며 대표팀의 척추를 곧추세웠다.
이청용은 설기현(30)의 자리였던 오른쪽 측면자리의 새 주인이 됐고 조용형(25)과 이정수(29)는 독일월드컵 때 최진철(38)과 김영철(33)이 주전으로 뛰던 중앙 수비를 접수했다.
#하늘은 우리편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허 감독이 마음을 비우고 팀을 이끌자 그에게 천운이 따랐다. 지난해 11월 19일 사우디 원정경기에서는 ‘할리우드 액션’으로 퇴장당한 하자지의 공백 덕분에 2골을 몰아치며 19년 만에 사우디를 꺾을 수 있었다. 2월 11일 이란과의 원정경기에서는 후반 36분 터진 박지성의 극적인 동점골 덕분에 1-1로 비겼고, 4월 1일 북한과 최종예선 5차전에서는 0-0이던 후반 2분 북한 공격수 정대세의 헤딩 골이 골라인을 넘어갔지만 노 골로 판정된 덕분에 후반 막판에 터진 김치우의 결승골로 짜릿한 1-0 승리를 맛봤다.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을 확정한 UAE전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기성용의 골은 미드필더가 문전까지 파고들어가 넣은 집념의 골이었지만 상대 골키퍼의 실수가 있기에 가능했다. 골 아웃되는 공이었는데, 이를 놓친 심판의 판정 때문에 골로 이어졌다.
경기의 흐름 상 기성용의 추가골이 아니었으면 대표팀은 어려운 경기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골이 터지면서 깔끔하게 완승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16강 드림 프로젝트
대한축구협회는 축구대표팀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에서 16강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는 맞춤형 훈련계획을 일찌감치 마련했다. “본선에 가기 전에 어쭙잖게 준비하기보다 확실히 준비하고 싶다”는 허정무 감독의 뜻에 따라 2002년 한·일월드컵에 버금가는 ‘드림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축구협회는 사상 첫 원정 16강 달성을 위해 태극전사들을 아시아축구라는 우물에서 꺼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8월 12일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위 파라과이를 불러들여 친선경기를 치르게 한다. 파라과이는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브라질에 골 득실에 밀려 1위 자리를 내줬지만 6승6무1패(승점 24)를 기록 중인 강팀이다.
축구협회는 파라과이전으로 대표팀에 남미 예방주사를 놓은 뒤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유럽 스타일의 축구를 구사하는 호주를 불러들인다. 대표팀이 9월 5일 FIFA 랭킹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산하 국가 중 가장 높은 29위인 호주를 상대로 ‘모의고사’를 치르게 한다.
10월에 태극호와 비(非)아시아 팀과의 평가전을 계획한 축구협회는 11월에 월드컵 유럽예선 1위 팀과의 ‘빅뱅’을 마련한다. 차포 다 뗀 유럽팀을 불러들여 평가전을 치르지 않고 직접 유럽으로 나가 정예선수들이 모두 합류한 강호와 맞붙게 한다. 허 감독은 최근 “7골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FIFA랭킹 1위 스페인과 맞붙고 싶다”고 말했다.
축구협회는 월드컵의 해인 2010년 1월과 2월에는 해외전지훈련을 통해 허 감독이 월드컵 베스트 11의 윤곽을 그리게 한다. 아울러 5월 초순부터 들어갈 마지막 담금질에 앞서 또 한번의 빅매치 계획을 세웠다.
전광열 스포츠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