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최익성은 1994년 연습생 신분으로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할 때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2군에서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노렸고 결국 1997년 20-20클럽에 가입하며 ‘연습생 신화’로 관심을 모았다. 98년 23차례나 공에 맞아 시즌 최다사구 기록을 남길 때만 해도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후론 해마다 팀을 옮기는 떠돌이 인생으로 전락했고 2005년 말 SK의 코치 연수 제의를 거부한 뒤 최향남과 함께 강원도의 산으로 들어가 칩거생활을 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둘밖에 없었어요. 향남이도 그렇고 저 또한 평범한 사고를 갖고 있지 않거든요.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욕심과 목표가 비슷해서 의기투합했고 결국 지인이 있는 산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한 달가량 산 속에서 생활하다가 하산 후엔 미국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갖고 있던 차와 집을 모두 팔아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향남이는 클리블랜드 마이너리그에 입단했고 전 거기서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멕시코까지 날아갔더랬죠.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말도 안 통하는 데서 죽지 않고 살아 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빈털터리가 돼 귀국해선 다시 산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한다. 혼자서 외로움, 두려움과 싸우며 3개월을 버틴 후 또다시 속세로 돌아온 최익성. 입단테스트라도 받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려봤지만 오라는 데도 갈 데도, 또 갈 차비도 없게 되자 새삼 비참함을 곱씹어야 했다.
“그 무렵 추석이 다가왔어요.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집을 찾았는데 오랜만에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시는 거예요. 나이 먹은 아들이 더 이상 고생하는 걸 볼 수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순간, ‘이젠 그만해야 겠다’ ‘여기서 미련을 거두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야구 안 할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번엔 어머니가 ‘그럼 뭐 먹고 살려고?’하며 또 걱정하시는 거예요.”
▲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노숙자나 다름없었어요.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2005년 이후 미국 갔다 온 뒤로 생활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야구를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친한 선후배들한테 전화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은퇴 후 편하게 살 수도 있었어요. 코치 연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먹고 살 걱정은 없었겠죠. 그런데 전 야구를 통해 돈을 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했다면 이전에 돈을 벌어 들였을 거예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야구에 대한 제 사랑은. 그래서 결혼도 안 한 거죠. 결혼을 하면 더 이상 야구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될까봐.”
최익성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거린다. 이젠 야구를 다 잊었다고, 그래서 미련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야구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던 그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잃은 게 너무 많았지만 그 시간들 동안 얻은 것도 많은 최익성이었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뜻하지 않은 데서 진짜 인연을 만난 상황은 최익성한테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줬다. 그래서 이번엔 최익성이 결코 잊지 못할 인연에 대한 얘기들로 분위기를 바꿨다.
먼저 이승엽이다. 이승엽이 대구에서 겨울 훈련을 할 때마다 항상 옆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최익성이다. 기자들이 이승엽을 취재하러 대구의 한 헬스클럽을 방문했을 때마다 최익성도 그 옆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있었고 기자 또한 그 헬스클럽에서 최익성을 만난 기억이 있다.
“삼성에 있을 때는 승엽이랑 그렇게 친하지 않았어요. 삼성 나온 뒤 1년여 동안 승엽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승엽이가 다가오더라고요. 승엽이는 만인이 다 아는 ‘국민타자’였고 전 실패한 떠돌이 인생이었기 때문에 제 입장에선 감히 승엽이한테 다가 설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승엽이가 절 챙겼어요. 식사는 했느냐, 지금 운동은 하느냐, 잠 잘 데는 있느냐 하면서 절 데리고 다녔어요. 당시 제가 믿었던 사람은 전부 등을 돌린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가진 게 없으니까 모두들 떠나더라고요. 그런데 승엽이는 변함없이 제 옆에서 절 감시하며 운동을 시켰습니다.”
최익성이 야구를 계속 할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의 도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승엽이었다. 요미우리 코치 연수를 제안했던 것도 이승엽이었고 거의 성사 단계까지 갔다가 막판에 틀어졌을 때 최익성보다 더 속상해 하고 흥분했던 사람도 이승엽이었다고 한다.
“야구말고 연기한다고 했을 때 승엽이가 반신반의하더라고요. 이번에 드라마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고서야 제 말을 믿는 눈치였어요. 요즘도 전화해선 ‘형, 뭐 먹고 살아요? 도대체 언제쯤 올라와요? 올라오긴 올라와요?’하며 걱정을 늘어놔요. 다음 작품이 준비돼 있느냐며 자기가 더 난리예요. 전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거든요. 야구 때문에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졌지만 야구를 안 하기로 한 이상,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어요.”
최익성은 진정한 ‘감독님’으로 삼성 시절의 백인천 감독과 SK 김성근 감독을 꼽는다. 백 감독과는 사제지간의 인연이 있었지만 김 감독과는 단 한 번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최익성의 가슴에 김 감독이 자리하게 됐을까.
“선수 생활을 하면서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야구를 해보고 싶었어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번번이 제가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죠. 오갈 데가 없을 때 김 감독님께 전화를 드려서 테스트 받고 싶다고 부탁드렸어요. 그래서 허락을 받고 찾아갔는데 제 실력이 별로 신통치가 않았던 거예요. 더 매달리는 건 그분께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 연락드리지 못했어요. 얼마 전 인천문학경기장에 촬영차 갔다가 오랜만에 인사를 드렸더니 무척 반가워하시더라고요.”
최익성은 김성근 감독이야말로 야구를 가장 순수하게 사랑하는 지도자라고 말한다. 그런 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독님’으로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라고.
▲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서 마동탁 선배 역으로 나오는 최익성. 사진제공=MBC | ||
윤태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최익성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윤태영과 여주인공 김민정의 연기하는 모습과 평소 생활 태도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연기자의 길을 생각하게 됐고 연기가 자신의 또 다른 직업으로 자리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됐다. 야구에선 ‘실패’란 이름을 떠안고 끝났지만 연기에선 ‘성공’이란 화려한 타이틀만 갖고 싶다는 욕심도 꺼내 보인다.
그리고 최익성이 항상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고 3때 중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최태식 씨(전 경북야구협회 전무)다. 야구 감독을 하셨던 아버지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고 아버지와 약속한 대로 자신의 인생을 야구에 올인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돈 한 푼 없어도 구차하게 살진 않았습니다. 야구만 포기했다면 먹고 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어요. 주위의 온갖 비난과 손가락질 속에서도 야구를 쉽게 그만두지 못했던 건 아버지 때문입니다. 멀리서 절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에게 단 한번이라도 야구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또 다시 눈물을 흘린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눈이 벌게질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그가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려봐 달라고 질문하자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며 감정을 토해낸다. 지금까지 야구 때문에 여자나 사랑을 포기하고 살았지만 앞으론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밤샘 촬영, 수면 부족, 지루한 기다림 등도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는 최익성. 야구한테 쏟아 부은 열정의 50%만 있어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는 그는 연기자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영화의 타이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로 ‘저니맨’이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