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꿈치 통증으로 재활 중인 백차승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메이저리그 입성 후 재활훈련까지 굴곡 많은 사연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전문기자 | ||
호텔 로비에서 기자를 만난 백차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마지막일 것으로 믿었던 마이너리그에서의 재활 등판이 허무하게 끝난 직후라 백차승의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백차승은 오히려 취재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좀 더 돌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병원에서 MRI, X-ray 다 찍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공을 던지려고 하면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다보니 스피드도 안 나고 제구도 안 되고 그렇죠. 일단 내일 샌디에이고로 이동해서 팀 닥터를 만나 정밀검진을 받아보려고 해요.”
메이저리그 진출 만 10년째. 부상으로 보낸 시간들이 절반을 넘는다. 더욱이 올 시즌은 샌디에이고 제3선발로 낙점된 후 지난해에 이어 풀타임으로 메이저리그를 소화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스프링캠프 때 팔꿈치 통증이 재발해 빅리그 마운드에 못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2001년 시애틀 입단 직후 팔꿈치 인대 수술을 받았잖아요. 수술하고 나면 더 이상 통증이 재발되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었거든요. 중·고교 시절부터 공을 많이 던졌던 후유증이 계속 되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직업병이에요. 어쩌겠어요. 제 팔자고 제가 다 감당해야 하는 몫인데요 뭘. 포기하지 않고 몸을 다시 만드는 방법 외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백차승은 지난 시즌 도중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로 이적했다. 트레이드 당시 백차승은 샌디에이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샌디에이고는 나한테 행운의 땅’이란 최면을 걸었다고. 날씨는 물론 팀 분위기, 감독, 선수들의 반응들이 시애틀보다 훨씬 따뜻하고 가족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버드 블랙 감독이 보여준 신뢰가 백차승의 자신감을 한층 북돋워줬다.
“그런데 그 기회와 행운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 팀 분위기가 부상 선수들의 속출로 엉망이거든요. 선발진은 완전 붕괴되다시피 했어요. 그러다보니 팀 성적도 바닥을 헤매고 있고 팀을 위해 하루 빨리 몸을 만들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던 게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블랙 감독한테 면목이 없어요.”
돌이켜보면 재활로 점철된 야구인생이라 ‘재활’이란 단어만 나와도 백차승은 참으로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말로 다 표현 못해요. 수술하고 500일 동안 재활군에 머문 적도 있었어요. 수많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죠. 내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구요. 너무 힘들어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선수들을 생각해요. 그런 선수들에 비해 그래도 전 행운아라고 위로를 하죠. 어려운 과정들을 극복하고 견뎌내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지금의 백차승이 있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봐요.”
20대 초반에 시작한 미국 야구가 어느덧 강산이 한 번 변하고 30대 초반의 ‘오늘’로 와 있다. 메이저리그 신인 때의 야구와 지금 백차승이 보는 야구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전에 (추)신수랑 그런 얘길 했었어요. ‘우리가 지금의 기량이나 마음가짐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훨씬 나은 모습이 돼 있었을 텐데’ 하고요. 처음엔 멋모르고 무조건 덤벼들었죠. 2~3년만 고생하면 쉽게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있을 거란 환상도 있었어요. 재활로 많은 시간들을 야구장 밖에서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얻은 거라면 야구를 대하는 깊이와 태도 등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2008년 6월 클리블랜드에서 상대팀 투수와 타자로 만났던 백차승과 추신수. 백차승에게 투수가 본 추신수란 타자는 어떤 선수인지를 물었다.
“아주 까다로운 타자예요. 누구보다 목표가 뚜렷한 선수이고요. 열정과 근성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죠. 부산고 시절 모든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를 꿈꿨지만 저랑 신수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건 분명한 목표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목표를 갖게 해주신 분이 돌아가신 조성옥 감독님이지만, 신수랑 전 그 목표를 잠시도 잊지 않고 뛰었어요.”
백차승은 추신수와 마운드에서 맞붙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경기 전날 신수네 집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서로 살살하자고 약속했는데 막상 게임을 하다보니까 살살하게 되지 않더라고요(웃음). 신수도 마찬가지였고요. 승부다보니 전력을 다해 던졌고 신수는 까다로운 공을 잘 골라서 2루타를 만들더라고요. 그 다음엔 아웃이었고 세 번째 타석에선 삼진을 당했는데 그 정도면 비긴 셈이죠. 어느 타자보다 생각을 많이 해서 공을 던진 게 신수와의 대결이었어요.”
추신수 얘기를 꺼내던 백차승은 또 다른 한 명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조성옥 감독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길 듣고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부산고 3학년 때 부임해 오셔서 하위권에 맴돌던 팀을 그 멤버 그대로해서 전국대회에서 준우승까지 올려놓으셨거든요. 어린 시절 사직구장에서 롯데 3번타자로 뛰는 선수 시절의 감독님을 잊지 못해요.
공수교대 때나 수비하러 나올 때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전력질주를 하셨거든요. 그때 아버지께 저 선수 이름이 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타석에 설 때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그 분이 제 스승님이 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야구에 대한 사랑이 엄청나셨어요. 운동장 안에서는 진짜 호랑이 감독님이셨지만 훈련이 끝나면 마치 큰형처럼 따뜻하게 감싸주셨어요. 아직 젊고 하실 일이 많으신데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게 맘이 너무 아픕니다.”
“솔직히 제가 대표팀에 뽑힐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명단에 들어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선수들이랑 한데 어울려 팀을 위해 동고동락하고 싶은 갈망이 컸습니다. 그러다 올시즌의 중요성이 너무 컸었고 제가 걸은 길이 다른 선수랑은 분명 다른 색깔이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예정된 대로 그 길을 가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때 김인식 감독님께 전화를 드려서 제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충분히 이해하신다면서 팀에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더라고요. 정말 감사했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백차승은 한국대표팀이 애리조나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할 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랑 연습 경기를 하게 된 부분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대표팀에는 청소년대표팀 때 같이 뛰었던 동기들도 있었어요. 이진영, 이택근 등. 오랜만에 대표팀 숙소에서 동료들도 만났고 식사도 하고 그랬어요. 어느 기사에는 저랑 대표팀 선수들과의 만남이 ‘어색한 만남’이라고 표현했던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웃음). 블랙 감독님이 김인식 감독님한테 인사 좀 시켜달라고 해서 제가 갑자기 통역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랑 같이 뛰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참 부러웠습니다. 대표팀 생활이.”
화제를 바꿔서 백차승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풀어나갔다. 그런데 백차승한테서 뜻밖의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을 만나기도, 앞에 나서기를 끔찍이 싫어했다는 것.
“제가 유일하게 어깨 펴고 있었던 곳이 야구장이었어요. 야구장 밖에만 나가면 항상 움츠러들었던 것 같아요. 왜 그랬냐고요? 글쎄요…, 어린 시절 워낙 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학교에서 돈을 내라고 하거나 준비물을 사오라고 하면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야구팀 회비도 제때 내질 못했어요. 아버지가 가구점을 하시다가 부도를 맞고 실패하시는 바람에 세 끼니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였거든요.”
백차승이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물론 야구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야구를 하면 학교에서 밥을 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달 내내 라면만 먹고 산 적도 있었고 세 끼를 두 끼로 줄여서 배고픔에 허덕거리며 지낸 적도 많았지만 야구를 하게 된 후론 밥 먹을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 지난날을 떠올리는 백차승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마는 백차승의 얼굴에서 참으로 많은 사연들을 읽게 된다.
“제가 부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야구를 포기할 수 없는 건 제가 가장이기 때문이에요. 제가 아니면 우리 가족들 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제가 야구를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정말 좋아서 시작한 야구가 어느 순간 생활 수단도 된 거죠. 싱글A나 더블A시절, 한 달 월급이 500불도 채 안 됐어요. 그 돈 갖고 집세 내고 밥 먹고 살기도 어려웠죠. 그때는 트리플A에 있는 선수가 너무 부러웠습니다. 트리플A에 있으면 한 달에 2000달러 이상은 받았으니까요. 그러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니까 트리플A에서 한 달 버는 걸 하루에 벌 수 있더라고요. 왜 그 수많은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빅리그를 꿈꾸는지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연봉 40만 달러의 최저 연봉자이지만 이전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보면 너무나 엄청난 금액을 받는 거죠.”
2년 전 시애틀에서 만났던 백차승과 지금의 그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의 여론에 심한 상처를 받고 몸살을 앓았던 백차승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백차승은 그런 선입견과 오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단단함과 한층 성숙된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변화의 배경에는 한 여성이 존재했다. 백차승에게 무한한 힘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샌디에이고 유학생인 여자친구였다. 만난 지 1년 정도 됐다는 두 사람은 여전히 좋은 자극과 동기부여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서포터스를 자처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카지노가 즐비한 거리를 거닐다 허름한 바에 들어가서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백차승이 전화를 받는다. 깜짝 놀란 백차승의 얼굴, 그리고 이어진 한 마디! “와~ 이거 어떻게 해요? 우리 팀에 신종플루에 감염된 선수가 두 명 있는데 우리 팀 선수들이 모두 호텔에서 격리된대요. 내일 샌디에이고로 혼자 가려 했는데 저도 갈 수 없다는데요?” 포틀랜드 비버스는 결국 솔트레이크시티와의 원정 2연전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현지에서 체감한 신종플루의 위험성이 기자 코앞에까지 다가온 셈인가?
네바다 리노=riveroflu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