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텐진에서 열린 2009 FIBA 아시아 챔피언십. 사진출처=FIBA Asia | ||
#예견된 참패
이번 대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전담 코칭스태프 선임만 봐도 문제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남기 감독-김유택 코치 등 전임 국가대표 코칭스태프가 프로농구 대구 오리온스에 영입된 후 KBA는 후임 코칭스태프 후보를 적극 논의했다. 사실상 후임 감독을 내정했으나 KBL의 협조는 없었다. 전담 코칭스태프를 운영하려면 매년 수억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사실상 KBA의 ‘돈줄’을 쥐고 있는 KBL의 협조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이 때부터 두 단체 사이에서는 대표팀 출범 초기부터 감독 선임, 선수 선발 등의 문제로 끊임없는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KBL은 KBA의 행정적 무능력을, KBA는 KBL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끊임없이 헐뜯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이번 대회에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출전했던 선수들은 사실 피해자나 다름없다. 장장 6개월에 달하는 시즌을 마치고 나서 컨디션을 추스를 틈도 없이 곧바로 합숙훈련을 시작해야 했다. 제대로 된 조직력과 팀 전술을 만들고 익힐 여유도 없이 이미 버거운 상대가 되어버린 중동팀들을 상대해야 했다.
#톈진의 식당서 벌어진 일
이런 선수들의 피해의식이 극대화 되면서 드디어 사단은 나고 말았다. 전육 KBL 총재에게 대표팀의 한 선수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16일 중국 톈진의 한 한국식당. 한국은 대만에도 어이없이 패한 뒤 필리핀을 겨우 물리치고 아시아 7위로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를 초라하게 마친 상태였다. 전육 KBL 총재를 비롯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대회 응원차 현지를 찾은 각 구단 사무국장, 그리고 취재진과 관계자들까지 모두 마지막 회식자리에 참석했다.
문제의 발단은 식사 직전 전 총재가 마이크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을 낸 선수단을 격려하고 다음 기회를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내자는 식의 멘트를 기대했던 선수들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독설이 쏟아졌다. 이번 대회에서 그나마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김주성과 양희종(25ㆍ상무)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질책을 면할 수 없었다. 당시 회식자리에 참석했던 모 관계자는 “밥상 앞에 앉아 정확히 11분 동안 총재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두 선수의 실명을 정확히 거론하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식의 말이 총재의 입에서 나왔다”고 증언했다.
대표팀 선수단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3개의 단어가 선수단을 크게 자극했다. 총재의 말을 요약하자면 ‘KBL이 전폭적인 지원(1)을 했는데, 우물 안의 개구리(2)와 같은 선수들이 처참한 성적(3)을 내서 농구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는 것이었다. 전폭적인 지원, 우물 안의 개구리, 처참한 성적이라는 말에 선수단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면목이 없어서 고개도 못 드는 선수단 앞에서, 그것도 밥상 앞에서 그런 말이 적당한 발언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총재의 긴 연설(?)이 끝난 뒤 총재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선수단을 격려하고 있을 때 모 선수가 총재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시한 것. ‘운동선수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것인가, 대회에 지려고 오는 선수들이 어디 있겠는가, 김주성 양희종뿐만이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그 선수의 하소연이었다. 이후 그 선수는 회식자리에서 나가 눈물을 쏟았고, 예상치 못한 반발을 겪은 총재는 당황한 나머지 폭음을 했다는 후문이다.
#세대 교체중…희망 있어
한국 남자농구가 참담한 실패를 겪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가능성을 본 것만은 확실하다. 아시아 남자농구가 더 이상 중국의 독무대가 아닌, 우열을 가리기 힘든 6~7개 국가들의 치열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란이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레바논과 요르단은 신흥 강호로 급부상했다.
한국이 이란과 레바논에 패하긴 했지만 충분히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몇몇 주축 선수가 잔부상 없이 제 컨디션을 유지했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더구나 한국은 세대교체가 완성기에 접어들고 있다. 하승진(24ㆍKCC) 오세근(22ㆍ중앙대) 최진수(20ㆍ메릴랜드대) 등 신장 2m 대의 장신 선수들이 모두 차세대 한국 농구의 에이스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큰 대회 경험과 관록을 쌓는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윗분’들의 협조다. 이미 KBA의 일부 인사들은 사실상 KBL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이번 대회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제 와서 실패의 원인을 KBA의 무관심과 무능력 탓으로 미루려는 KBL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프로리그가 활성화 돼있는 종목의 경우 국가대표팀이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프로연맹과 해당 협회의 공조가 필수적이다.
“KBL 총재님은 국가대표팀을 ‘KBL 선발 올스타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라는 한 국가대표 선수의 뼈있는 농담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KBL도, KBA도 함께 고민해볼 시기다.
허재원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