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시작이다_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최고로 멋지게 장식하고 싶다는 김병현, 그는 재기를 위해 이달 중순 미국 훈련을 떠날 계획이다. | ||
지난해 3월 피츠버그에서 방출된 후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던 김병현이다. 욕심을 조금만 버리고 현실에 맞춰 그럭저럭 살았다면 소속팀도 생겼을 것이고 여전히 유니폼 입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병현은 팀을 알아보다가 잠시 야구판을 떠나 있었다. 그러다 공식석상에 다시 나타난 게 지난 1월 WBC대표팀 출정식 때였다. 당시 김병현은 출정식 이후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나도 대표팀에서 뛰고 싶었다. 그러나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서 대표팀에 욕심을 낸다면 민폐 아니겠나. 민폐보단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밝혔는데 그만 여권을 분실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병현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만 해도 여권을 다시 만들어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소집 일정에 여유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여겼던 것.
“대표팀 출정식 이후 김인식 감독님께 직접 전화를 못 드렸던 것도 오해를 샀던 것 같아요. 전 몸을 만든 후에 감독님께 전화를 드리려 했었고 감독님께서는 연락이 안 되니까 저에 대해 신뢰를 못하셨던 거고. 모든 건 소통의 부재로 인해 빚어진 제 잘못이었어요. 민폐가 안 되려고 나름 노력 많이 했는데 그 일로 결국 대표팀에 해만 끼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김병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도 궁금했다. 그가 야구를 계속 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포기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무슨 다른 일을 하는지…. 가끔씩 통화할 때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근황을 물어보면 ‘저야 뭐, 항상 그렇죠’하고 끝을 흐렸던 탓에 그의 속마음이, 그리고 야구에 대한 생각이 어떤지 너무나 궁금했던 것. 그래서 김병현한테 양해를 구한 뒤 녹음기를 켜 놓고 다음과 같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WBC 때 얘기를 조금만 더 해볼게요. 만약 그 당시에 자신의 입장에 대해 김인식 감독님께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면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잘 아시다시피 제가 그렇게 주변머리 있는 사람이 안 되잖아요. 저에 대해 표현하는 것도 서투르고. 제가 저에 대해 포장도 잘하고 남을 설득하는 말주변도 되고 그랬으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죠. 여권을 분실했다고 전화를 드렸는데 KBO 관계자 분이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그때만 해도 큰 걱정은 없었어요. 여권 찾아서 바로 출국하면 되니까. 그런데 오지 말라고, 대표팀 명단에서 빼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김인식 감독님께 너무나 죄송해서 전화를 드렸던 거고요. 만약 제가 정말 필요한 선수였다면 어떻게 해서든 합류시켰겠죠. 제 자신도 제 공에 대해 아리송한 상태에서 감독님께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여권을 분실했다고 거짓말한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런 소문 들어봤어요?
▲네…. 참 답답했어요. 제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까, 이런 일이 생길 때 이렇게도 소문이 날 수 있구나 싶었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전 그리 머리 쓸 줄도, 계산할 줄도 잘 모른다고. 여권을 들먹거리며 거짓말하기보단 몸이 안 만들어졌으면 공을 던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을 겁니다. 전 그 당시 오랜 이닝은 힘들어도 1~2이닝 정도는 충분히 던질 자신은 있었어요.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제가 대표팀 출정식에 가서 유니폼 입고 포즈까지 취했던 건 야구에 대한, 대표팀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다. 소속감이 그립기도 했고. 그런데 그 실수가 절 또 다시 이상한 놈으로 만들었죠.
―워낙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까 사업을 한다느니, 야구를 완전히 포기했다느니, 잠적했다느니, 거취와 관련해서 얘기들이 많았어요.
▲야구를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공 던지는 게 맘에 들지 않은데 억지로 꾸역꾸역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거의 2년을 논 셈이네요. 처음엔 안 좋았던 몸, 제대로 잡아가면서, 스트레칭이나 하면서, 인생 즐기면서 살아야겠다 했는데 막상 야구판을 떠나니까 답답해지더라고요. 사업이요? 미국의 스시집 얘기 하시는 거죠? 그건 좀 와전된 게 있어요. 제가 주인인 건 맞는데 아는 형이 전적으로 다 맡아서 하시거든요. 미국 들어갈 때 가끔 가보는 정도예요. 제가 요리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거기 나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야구를 포기한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지금까지 온 거예요.
▲제가 꼭 선발만 고집했던 건 아니에요. 그 당시 이 정도의 공을 던진다면 선발도 가능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거죠. 문제는 선발이냐, 불펜이냐가 아니라 제 공에 대해 제 자신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겁니다. 만약 처음부터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 뛰었다면 정말 잘했을 것 같아요. 부상 없이 계속 갔다면 말이죠. 몸을 다치고 나니까 이전에 던졌던 공이 안 나왔어요. 2007년 플로리다에서 선발로 뛰며(중간에 잠깐 애리조나로 ‘점’만 찍고 왔지만) 그 좋지 않은 몸 상태에서도 전반기에 7승을 올렸습니다. 만약 안 다치고 올스타전을 치른 후 복귀했다면 13승 이상은 올릴 수 있었어요(2007시즌 김병현은 10승8패의 성적을 거뒀다). 나이가 들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고 그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살라고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제가 제 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야구에 관해 너무 완벽함을 추구한 거 아닌가요? 조금만 덜 완벽하려 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설령 100%는 안 된다고 해도 70~80%는 이전처럼 공을 던질 수 있어야 다시 야구를 해도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분야는 절대 안 그런데 이상하게 야구에 관해선 제가 심하게 예민해요. 유명한 화가나 도예가들이 작품이 맘에 안 들면 막 찢어버리거나 깨부수잖아요. 제가 딱 그래요. 조금은 ‘대충’하는 것도 필요한데 야구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선수가 ‘운동’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아트’를 하려니까 그게 문제죠(웃음).
―좀 전에 언뜻 듣기에 다시 야구를 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터닝포인트가 있었어요. 계속 야구를 다시 할 것인가, 여기서 그만둘 것인가를 놓고 고민만 하다가 지난 5월에 저한테 아주 중요한 계기가 생겼죠. 아버지가 자주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최고였을 때 은퇴하라고. 힘 떨어져서, 마지못해 은퇴하면 은퇴해도 미련이 남는다고…. 제 꿈은 선동열 감독님처럼 선수생활의 엔딩을 최고로 멋지게 장식하는 거예요. 더 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스톱’을 외치신 부분이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보려고요.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어서, 은퇴를 해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서,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이 있나요? 훈련은 어디서 하는 거죠?
▲일단 9월 중순경 미국으로 들어갈 거예요. 제대로 다시 시작해볼 겁니다. 혼자 운동하기가 만만치 않겠지만 플로리다 쪽이나 애리조나 등 더운 곳에서 몸을 만들어 보려고요. 내년 시즌에는 더 이상 놀고 싶지 않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제가 공에 관해선 워낙 욕심이 많아서 기대한 만큼의 구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깨끗이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일단은 해보려고요. 하는 데까지 해봐서 되든 안 되든 제 자신에게 납득은 가게 해야죠.
―김병현 선수의 팬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은데요?
▲절 많이 잊으셨을 거예요. 요즘은 이렇게 다녀도 알아보시는 분들이 거의 없어요. 정말 야구 좋아하는 남성 분들을 제외하곤. 그래서 다니기 훨씬 편해요. 쫓아다니는 기자 분들도 없고요(웃음).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어 볼 생각은 없어요? 물론 뛰고 싶다고 해서 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어휴, 제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요. 그냥 미국에서 했던 야구는 미국에서 마무리 짓고 싶어요. 더 이상 재기하기 어렵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 마음 고생을 해도 그냥 미국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김병현은 오래전 개그맨 이휘재가 연기했던 ‘인생극장’이란 프로그램을 거론하며 ‘내가 만약 미국에 안 가고 연고지인 해태(현 KIA)에 입단했더라면?’이란 주제로 얘기를 꺼내기도 했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아무 걱정없이 지금까지 야구만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선수를 보호하고, 선수에 대해 마케팅도 해주고, 선수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한국 프로야구팀에서의 김병현은 ‘똘아이’나 ‘망나니’나 ‘성격파탄자’도 아닌 인간 김병현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참으로 많은 의미가 묻어 있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한가득이었던 김병현이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걱정을 털어놓는다.
“괜히 야구 다시 한다고 인터뷰 기사 나가면 말부터 앞선다느니 뭐라 하실 것 같은데요? 조용히 해보다가 안 되면 말면 되는데…. 그동안의 야구인생은 복잡다단했지만 그 엔딩은 멋지게 장식하고 싶어요.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엔딩으로 야구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으면 좋겠네요(웃음).”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