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 진준택 전 대한항공 감독, 반다이라 마모루 흥국생명 감독대행, 김진 전 SK 감독, 전창진 KT 감독, 유재학 모비스 감독, 허재 KCC 감독, 신만근 도로공사 감독.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진준택 전 감독(61)은 시즌 시작 한 달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대한항공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폐질환으로 수술을 받은 것이 원인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는 “사실 수술 자체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감독이란 자리가 주는 막대한 책임감과 부담이었다. 그는 코트 위에서 느꼈던 경기 성적에 따른 스트레스에 대해 “연패를 면치 못할 때는 여태껏 살면서 쌓아 놓은 모든 명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한다. 경기의 패색이 짙어질 때, 회사 관계자들과 주변 사람들의 눈에 무능한 감독으로 비춰진다는 생각이 들면, 불면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야 했다고.
“젊은 선수 시절엔 열정 하나로 미래를 생각하며 뛰었지만 감독이 된 후에는 용병 영입부터 선수교체 지시까지 매순간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불거지는 책임론들이 두려울 때가 많았다.”
프로농구 감독직에서 물러난 서울SK나이츠 김진 전 감독(49) 역시 코트 위에서 느꼈던 중압감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이번 시즌 13경기에서 단 1승을 거두는 등의 성적 부진으로 지휘봉을 넘긴 그는 “게임에 지든 이기든 다음 경기의 상대팀을 분석하느라 거의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면서 “매 경기 성적에 대한 긴장 속에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며 불면증에 시달린 것도 감독이란 자리에 있을 때 감내해야 했던 큰 벽이었다”고 토로한다.
선수 출신 감독들에겐 젊은 시절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스트레스보다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부산KT 전창진 감독(47)은 허리통증을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전 감독은 “장시간 정확한 상황판단을 위해 집중하며 서 있는 자체가 사실 상당한 체력소모”라며 “어떤 때는 경기 한 번를 치르고 나서 2~3㎏이 빠질 때도 있다”고 하소연한다. 특히 지난 시즌 땐 과도한 스트레스까지 겹쳐 경기 직전 링거를 맞고 코트를 지켜야 했을 정도로 체력에 부담이 오기도 했다. 또 매 시즌 작전지시를 내리느라 소리치다 보니 편도가 늘 부어 있는 것이 되레 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창원LG 강을준 감독(45) 역시 선수생활 때 받았던 세 차례의 무릎수술로 인해 경기장에 서 있을 때마다 통증을 느낀다. 강 감독은 “지난 시즌엔 경기 중 광고판에 몸을 지탱해 서 있었던 적도 있다”며 “울산 모비스와의 경기 바로 직전엔 이런저런 심적 부담감이 쌓여서인지 명치끝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지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경기 성적이 좋은 팀이라고 해도 감독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21일 현재 전주KCC, 부산KT와 함께 팀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는 울산모비스 유재학 감독(47) 역시 직업병을 달고 산다. “시즌 때는 경기가 계속되는 탓에 긴장을 해서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도 시즌이 끝난 후에는 목을 돌리지 못하거나 허리가 돌아가지 않는 등 근육 마비가 온다”며 자신의 직업병을 설명했다. 유 감독은 또한 혈당과 간 수치 이상 여부를 늘 민감하게 확인한다며 감독직의 애로사항을 토로했다.
1월 21일 현재, 여자프로농구 팀 중 1위를 달리고 있는 신한은행의 사령탑 임달식 감독(46) 역시 시즌 중반이 지나면서 심한 체력 저하로 고민 중이다. 게임 때 온 신경을 집중하다보니까, 막상 게임이 끝나면 탈진 상태가 되거나 맥이 풀린다는 것.
올해로 15년째 배구 감독직을 맡고 있는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55) 역시 해결할 수 없는 지병을 가지고 있다. 신 감독은 “코트 위에서 뛰는 선수 이상으로 경기 중 감독들이 쓰는 에너지도 상당하다”며 “긴박하게 진행되는 경기를 지켜보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다 보면 선수시절 입은 무릎부상과 허리부상이 경기 중 통증으로 이어져, 서 있는 것도 힘들어 앉아서 경기를 보고 싶을 때가 많다”고 호소한다.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55)은 시즌이 끝나면 빠트리지 않고 체크하는 것이 있다. 바로 병원에서 받는 종합검진이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바짝 신경을 쓴 후라 두통에 시달리는 것이 다반사고 늘 피로를 달고 살기 때문에 해마다 간수치 점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여자 팀을 맡고 있는 프로팀 감독들은 성적 이외에 팀 선수들의 정서적인 부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삼성생명 이호근 감독(45)은 “남자 팀이면 선수들과 소주 한 잔 하고 사우나를 함께하며 긴장감을 풀 수 있겠지만 여자 선수들은 감정적인 문제가 경기력에 영향을 많이 미치는 편이라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팀의 조직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선수의 사적인 문제까지 체크하고, 컨디션 조절이나 훈련 일정 등을 짤 때도 팀원들과 잦은 면담을 가져야 하는 의무감을 늘 안고 있다.
어창선 감독 이후 흥국생명의 새 사령탑이 된 반다이라 마모루 신임 감독 대행(41) 역시 여성 팀을 이끌어 나가는 노하우를 찾는 것이 가장 힘든 숙제라고 토로한다. 그는 “아무래도 여성 팀을 맡다 보니 세세하게 신경 쓸 부분이 많다. 그런 걸 어떻게 잘 해결해 나가느냐가 훈련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다”고 설명한다.
코치에서 감독으로 갑작스레 지휘봉을 넘겨받은 신임 감독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치열한 심리전을 실감하고 있다는 반응이다.
대한항공의 신영철 감독(46)은 팀의 연패 악순환을 끊고 경기성적 반등에 성공해 코트 안팎으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 감독직을 수행하는 데에 느끼는 중압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그는 경기마다 “선수들이 몸싸움을 할 때 감독들은 코트 위에서 치열한 심리전을 벌인다”고 설명한다. 그는 “선수 대하는 방식이야 코치 때와 다름없지만 상대의 전략을 파악해 작전을 잘 짜려면 경기 전날 뜬 눈으로 지새울 때가 다반사다”라고 말한다. 그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스포츠라지만 서너 가지의 상황변수에 따른 시나리오와 대처법을 고민하고 그것이 흐트러질까 경기 전 미리 시뮬레이션을 그리다보면 잠을 잔 것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라고 토로한다.
매 시즌 ‘직업병’으로 고초를 겪다보니 어쩔 수 없이 최악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선수들 앞에선 결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감독들만이 갖는 애로 사항이다.
9연패를 당하는 등 최하위의 수모를 제대로 겪고 있는 여자프로배구 한국도로공사의 신만근 감독(44)은 “성적 부진으로 우울증에 시달릴 때가 많다”며 “선수들의 사기를 생각해서 죽을 순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강한 ‘척’, 건강한 ‘척’하며 버티고 있다”고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는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넘어야 할 벽이라고 말하는 감독도 있다.
전주KCC 허재 감독(45)은 자신의 지병을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는 “선수 생활을 오래 하다 감독을 맡다 보니 코트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지만 불같은 성격 때문에 지고 나면 너무 화가 나서 잠을 못 자는 것이 시즌 때마다 느끼는 어려움”이라고 말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농구 감독은 “몸살로 인한 고온으로 온몸이 땀에 흠뻑 젖더라도 최대한 양복 상의로 가려 컨디션 저조를 숨기곤 한다”며 “코트 위에서 건강한 듯 서 있는 감독들 중 병 하나씩 달고 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피 말리는 경쟁 속에서, 겉으로 표현할 순 없지만 극심한 긴장감으로 인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은 모든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직업병’일 것이다.
승리를 위한 숨은 노력
혈색이 좋다고요? 그것도 작전임다!
▲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 이호근 삼성생명 감독, 강을준 LG 감독, 신영철 대한항공 감독이 경기 중 작전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습. | ||
반면 괜한 징크스가 생길까 우려해 진 경기 때 입었던 양복을 다음 경기 때 그대로 입고 가는 감독도 있다. 인천전자랜드 박종천 감독(40)은 “경기 전엔 작은 것도 신경 쓰인다”면서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지 않기 위해 게임에 진 날 입은 양복을, 다음 경기 때 똑같이 입고 꼭 이길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상대 감독과의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혈색을 좋아보이게 하려 노력한다는 것이 감독들의 전언. 그런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등산’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을 땐 주위 산을 천천히 걷다보면 마음이 정리가 된다는 것. 그마저도 여의치 못할 땐 반신욕으로 지치거나 피곤한 모습을 감추려 노력한다.
독일서 암투병 중인 이희완 전 GS 칼텍스 감독
아프고 힘들어도 그 생활 그리워…
▲ 독일에서 암투병 중인 이희완 전 GS칼텍스 감독(맨 오른쪽)과 다정한 가족들. | ||
그는 감독 생활에 대해 “경기 때마다 신경안정제라도 복용하고 싶을 정도로 성적에 대한 중압감이 대단했다”면서 “그 스트레스를 제대로 견디지 못했던 것이 위암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전 감독은 “연패를 끊지 못하거나, 선수 한 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변화만 생겨도 불면증과 식욕부진에 시달렸다”며 “감독으로서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시즌 중에 내 몸을 챙길 여유도, 신경 쓸 틈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완쾌 판정을 받으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프로 무대에 설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전 감독은 프로 감독으로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되돌아보면 한국 여자 배구 리그라는 것이 5팀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전력과 순위가 정해져 있는데 감독으로서 그것을 반등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힘겨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프로 감독이라는 위치를 자신의 몸이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의 생활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 상태가 좋아진 걸 느끼면, 한국에서 지도자로 활동하던 당시의 기억과 제자들이 있는 GS칼텍스 팀이 그리워진다”며 “스트레스와 성적 중압감에 시달리는 것이 감독이라는 위치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의 최대의 꿈은 감독이 돼 팀을 자신의 컬러에 맞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설명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