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권도전이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사진은 지난해 정부청사에서 강연하는 정 전 총장. | ||
정 전 총장의 갑작스런 부상은 본인의 ‘액션’이라기보다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친노그룹의 의도적 띄우기에 더 가깝다. 김 의장으로서는 정 전 총장을 통해 통합신당 창당에 가속도를 낼 수 있다. 친노그룹도 후보 다각화를 통해 경선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고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영향력 증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 전 총장은 극적인 경선 드라마를 빛내기 위한 엑스트라일 뿐 주연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정운찬 대권론’이 거품인지, 실체가 있는지 분석해봤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경기고 동문인 A 의원은 “그는 정치적 감각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그가 이미 서울대 총장 시절부터 ‘치밀한 계산’을 거쳐 정치권에 진입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앞서의 A 의원은 이에 대해 “‘왕이 되려는 자는 왕에게 칼을 겨눠라’라는 말이 있다. 정 전 총장도 지난해에 ‘본고사 부활’이라는 비판을 들은 바 있는 통합형 논술 실시를 주장, 노무현 대통령과 ‘맞짱’을 뜨면서 단번에 대권 후보군으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사실 노 대통령은 정 전 총장의 통합형 논술 실시 주장에 대해 ‘대학들이 논술을 본고사처럼 치르겠다는 것은 가장 나쁜 뉴스’라며 매우 불쾌해했었다. 노 대통령과 정 전 총장은 정권 출범 당시만 해도 노 대통령이 경제부총리 추천을 부탁하는가 하면 그 후에도 노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하는 등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 사건 뒤 두 사람의 관계도 급랭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정 전 총장의 강력 대응 방식을 보면서 정치권에선 그가 상당히 정치적이고 전략에 있어 내공이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가 잇따라 나왔다.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아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그때부터 나왔고 그 뒤 그의 이름이 대권 후보군에 본격적으로 거명되기 시작되었다.
또한 정 전 총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인위적 경기부양을 비판하는 등 경기부양론 등을 주장하며 노 대통령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인기가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항공모함을 좌우로 흔들어 국민을 배멀미하게 했기 때문’이라며 노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앞서의 A 의원은 “그가 사용하는 정교한 언술은 한 학자의 정책 비판을 넘어선 정치적인 액션으로 봐야 한다. 정 전 총장이 오래 전부터 정치권 진입에 뜻을 두고 정치적인 발언을 의도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B 씨도 이에 대해 “서울대 총장은 장관급으로 누구보다 대통령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움을 줘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통합형 논술 실시를 주장하자 노 대통령은 그의 주장에 뭔가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했던 것으로 안다. 그 뒤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하게 다운되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지난해 6월 노무현 대통령과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이 악수하는 모습. 정권 취임 초기만 해도 두 사람 관계는 좋았다. | ||
또한 올해 7월 초 서울대 영빈관에서 열린 그의 총장 퇴임 축하연은 흡사 ‘정 전 총장 대선 도전 선언의 밤’ 같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참석자들은 “시간이 되면 큰일을 하시라”, “상식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정 총장은 할 일이 많은 재목” 등의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정 전 총장은 “오늘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 전 총장의 한 지인은 주기적으로 정국 분석 보고서를 보내주며 그의 정치권 진출을 돕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정 전 총장의 정치권 진입은 적어도 지난해부터 물밑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한 방송사의 회견에서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며 ‘커밍아웃’의 일단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은 여전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고건 전 총리의 ‘강태공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모양새다(고 전 총리는 통합신당파에서 더 이상 대안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이 추대 후보가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독자적인 신당 창당을 추진하겠다면 진로를 변경한 상태다).
정 전 총장은 범여권 대선 후보들이 대부분 2%대의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면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자연스레 ‘정운찬 영입론’이 무르익을 때 비로소 움직일 것이다. 그는 최근 “정치 참여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도 “(출마를) 결심한다고 해도 현 여권 대선 주자들이 양보하겠느냐”고 반문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심정은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decisive(결단력 있는)’한 사람”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조순 선생님은 과감하지 못한데 나는 저질러보는 스타일이란 취지에서 한 말”이라고 밝혀 더욱 여운을 남기고 있다. 제대로 멍석만 깔아준다면 춤을 제대로 한 번 춰보겠다는 계산인 셈이다.
▲ 김근태 의장(왼쪽), 이광재 의원 | ||
당 사수파인 친노그룹도 정 전 총장 영입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들은 정 전 총장이 가지고 있는 개혁적인 이미지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통합신당파 가운데 상당수가 차기 대권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고 전 총리의 대항마로서 정 전 총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 전 총장 띄우기와 고 전 총리 깎아내리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노 대통령은 고 전 총리가 대권에 뜻을 품은 뒤부터 참여정부를 부정하는 듯한 언행을 보이자 사석에서 “배신자”라고 규정하며 매우 언짢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노 대통령이 최근 고 전 총리를 향해 “실패한 인사”라며 극언을 퍼부은 것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친노그룹의 핵심인 이광재 의원이 정 전 총장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정 전 총장 영입을 적극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여권의 역학 구도에 의해 ‘공중부양’된 정 전 총장이 과연 자신의 힘으로 그 위상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특히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전문가는 이에 대해 “정 전 총장의 정치 경력은 스승인 조순 전 부총리가 서울시장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을 도운 게 전부다.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여야 하는 정치판에서, 평생 학자로 살아온 그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발휘할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는 “조순 전 서울시장과 이홍구 이수성 전 총리 등 학자 출신 정치인들이 모두 (대선 꿈을 꾸다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비전과 노선’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정 전 총장은 ‘개혁적 리버럴’의 전형이다. 정치에 잘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 행보를 하더라도 상당 기간 신중한 태도를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정 전 총장을 잘 아는 정치권 밖의 한 인사는 “그는 신중하지만 정확하게 정치판을 읽고 있다. 야당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여당은 데리고 와서는 버릴 수 있다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그가 대선 굿판의 주역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의 정치문화로 볼 때 교수 출신이 치열한 정치판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 여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다. 누구든 데려올 수 있다. 서울대 총장이라는 좋은 그림이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경선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소품이자 ‘병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이 여권이 주는 대본을 뛰어 넘어 엑스트라에서 주역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내공을 발휘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