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월 25일 밴쿠버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서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이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
이상화
“16일 이후 한숨도 못 잤어요.”
여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에서 첫 금메달을 딴 이상화의 어머니 김인순 씨는 지난 2월 16일 경기가 끝난 후 모든 게 한순간 꿈으로 돌아갈까 아직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말한다. 링거를 맞고 인터뷰에 응할 정도로 몸은 약해져 있었지만 모니터 너머로 태극기를 흔들며 눈물 흘리던 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해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기적, 이변으로 부르는 승전보였지만 김 씨의 눈엔 오랜 시간 묵묵히 인내해 온 딸의 노력이 마침내 만들어낸 금빛 결실이었다. 또 혼자가 아닌 가족 모두가 일궈낸 금메달이었기에 더욱 값졌다. 특히 군소리 한번 하지 않고 동생을 응원해 온 친오빠 상준 씨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상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안 살림이 너무 어려워져 도저히 스케이트를 가르칠 수 없었어요. 당시 6학년이었던 큰애도 선수여서 둘 다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니 상준이가 내가 포기할 테니 상화는 끝까지 시켜주라고, 자기는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6학년. 동생 못지않은 스케이트 실력으로 각종 교내대회를 휩쓸던 장남이었기에 김 씨는 아들의 양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아들의 선택이 훗날 잘한 일이 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상화의 뒷바라지를 더욱 열심히 했어요.”
당시 김 씨는 살고 있던 다세대주택 지하실에 재봉틀을 들여와 옷을 만드는 일로 경제적인 부담을 덜고자 했다. 100만 원대를 호가하는 비싼 스케이트 장비와 훈련비를 모두 감당하기엔 충분치 않아 여전히 빚이 불어났지만 김 씨는 정말이지 쉴 틈 없이 일했다.
이상화 역시 대학교 1학년 때 찾아 온 슬럼프를 그런 오빠와 어머니 때문에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는 안 되는 것 같아”라고 하소연하는 동생에게 오빠는 “내가 누구 때문에 양보한 건데 네가 그렇게 약한 말을 해서 되겠냐”며 따끔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설 수 있었던 동계올림픽 무대. 밴쿠버로 떠나기 전 부모에게 이상화가 남긴 말도 “이제 올림픽에서 메달 따고 나면 엄마도 일 그만하시고 여가 즐기면서 편히 쉬시라”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지키려는 이상화의 마음을 알기에 결승점을 코앞에 두고 세계 신기록 보유자 예니 볼프를 제치며 조금씩 나아가던 그의 마지막 스퍼트가 적어도 가족들에겐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적이나 이변이 아니었다. 밴쿠버 빙상 위에서 이상화가 마지막까지 젖 먹던 힘을 다해 지켜낸 가족들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
||
| ▲ 위부터 이정수의 아버지 이도원 씨, 이상화의 어머니 김인순 씨, 모태범의 어머니 정연화 씨. 이종현·박은숙 기자 | ||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에서 64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한 모태범은 어떨까. 모태범의 어머니 정연화 씨는 이번 금메달의 80%는 아들의 유별난 승부욕이 빚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쟁쟁한 선수들의 그늘에 가려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 인터뷰 한 번 못해봤던 모태범. 경기 전날 친 누나와의 통화에서도 “기자들이 마이크 한 번 안 주더라. 서운하다. 소외감이 느껴진다”는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그만큼 그는 분명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있었다.
오랫동안 아들을 지켜본 어머니 정 씨는 변변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 모태범이 승부욕을 발휘해 뭔가 큰일을 해낼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면 어려서부터 지고는 못 사는,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모태범이기 때문이다. 금메달 수상 직후 만나본 어머니 정 씨는 아들의 승부욕을 나타낼 만한 사건들을 들려줬다.
“선배들이 입은 경기 의상을 입으면 그 기를 받아서 1등 한다고 2년에서 3년 정도 같은 걸 마르고 닳도록 입으면서 그렇게 신나 했어요. 어쩌다 2, 3등 하는 날은 화장실에서 혼자 고개 숙여 엉엉 울 정도로 누군가한테 지면 분해하더라고요.”
선수로서 발휘되는 경기 욕심뿐 아니라 유년시절부터 지고는 못 사는 성격과 고집에 가족들은 혀를 내둘렀다.
“고등학교 때 훈련장에 태워주려고 가는 길에 버스와 충돌사고가 났어요. 저희 차가 아무래도 좀 더 망가졌는데 저는 충돌에 의한 충격에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태범이가 옆에 없기에 놀라서 봤더니 어느새 밖으로 뛰어 나가서 버스를 발로 차고 있더라고요.”
네 살 때에는 쓰레기로 불장난을 하다 안에 있던 부탄가스가 터져 얼굴의 반쪽이 화상을 입기도 했다. 당시 살던 안산에서 광명까지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붕대를 칭칭 감은 얼굴로 놀러 나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에 온 동네 어른들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또 동네 형들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며 성인용 두발 자전거를 네 살짜리가 낑낑 대며 붕대 감은 얼굴로 타는 모습은 아직도 ‘면목동 납량특집’으로 남아 있다.
이런 그에게 마이크 한 번 쥐어주지 않는 수모(?)를 겪게 했으니 제대로 오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찌됐든 그 오기가 금메달을 빚어냈으니, 매스컴이 어느 정도는 그의 금메달에 도움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억지(?)도 부려본다.
이정수
이정수의 아버지 이도원 씨는 밴쿠버에서 돌아오면 아들을 혼쭐 낼 기세다. 금메달을 두 개나 따는 대형 사고를 쳐 각종 섭외요청과 축하전화에 아버지의 휴식시간을 모조리 뺏어 갔다는 게 이 씨의 반응. 무슨 사고를 두 개나 치냐며 원망 섞인 투로 말하지만 아들의 이야기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이번 사고가 일어나게끔 공모(?)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말로 다 못 한다”며 감사함에 고개를 숙인다.
특히 150㎝에서 멈춘 키가 170㎝가 되기까지 무료로 한약을 지어준 부친 이 씨의 고향 선배, 경기 날 ID카드도 입장권도 없어 새벽부터 비를 맞으며 야외에서 아들의 스케이트 날을 갈아야 했던 장비관리사이자 이정수의 선배 오세종 씨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다. 또 단국대 입학 후 익명으로 이정수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었던 이정수의 은사 이야기도 잊지 않는다. 이번의 승리는 오랜 시간 주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이 씨는 2관왕의 영광을 여러 사람에게 돌린다.
|
||
| ▲ 이정수가 남자 쇼트트렉 1000m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뒤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하루는 정수가 훈련이 끝나고 다른 학부모 차를 얻어 타려 주차장에서 비를 맞고 서 있었나 봐요. 배가 고픈지 빵을 먹으면서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가 그 이야기를 전해줬는데, 그때 얼마나 외로웠겠느냐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나죠.”
이승훈
수빈 크라머(노르웨이)의 실격처리로 남자 10000m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이승훈. 그의 부모는 각종 축하전화와 인터뷰 요청에 응답하느라 목이 쉬어 있었다. 이승훈은 작년 2월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3관왕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밴쿠버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2009년 4월)에서 탈락했다.
당시 쇼트트랙을 떠나도 스케이트 화는 벗을 수 없다며 눈물 뚝뚝 흘리던 아들이 선택한 스피드스케이팅. 어머니 윤기수 씨는 아들의 고집을 믿은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승훈이가 정말 그렇게 강렬히 원하지 않았다면 스피드스케이팅 종목 변경은 물론이고 스케이트 자체를 시킬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김 씨가 아들의 스케이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느낀 것은 이승훈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스케이트 그만하면 안 되겠냐는 부모의 권유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이승훈은 곧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 사립에서 국립 학교로 전학 가 등록금을 줄이고 상금이 걸린 대회에 모두 나가 상금을 타면 부족한 돈을 채울 수 있을 거라며 스케이트화를 두 손에서 놓지 않은 것.
이후 혹시나 또 스케이트를 그만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을까 힘든 내색 한마디 하지 않고 버티는 어린 아들의 오기에 부모님도 묵묵히 그의 뜻을 따라왔다.
“태릉 실외 아이스링크장에서 서너 시간 스케이트를 타면 콧물로 코가 얼어붙어 고통을 느낄 정도예요. 얼굴이 따가워 엉엉 울면서 스케이트를 타는 게 보이는데 혹시 그만두라고 할까봐 싫다거나 힘들다는 얘길 단 한 번도 하지 않더라고요. 어쩌겠어요, 그렇게 좋아하는데 시켜줘야지.”
국가대표 선발전에 떨어졌던 순간에도, 모두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던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환할 때도 어머니 윤 씨는 빙상 위에 서는 것이 아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응원했다고 한다. 지난 2월 24일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벌어진 반전의 금메달은 그런 오랜 정성을 하늘이 알아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