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손 전 고문은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네 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첫 번째는 2007년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을 탈당, 시베리아 벌판인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에 참여한 것이다. 두 번째는 2011년 4·27 분당을 보궐선거 출마다. 그다음은 참패한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이다. 네 번째는 2014년 7·30 재보선이다.
차기 대선을 1년 반 앞두고 정계복귀를 선언한다면, 다섯 번째 승부수가 된다. 판은 깔렸다. 더불어민주당은 친노(친노무현)계 서영교 의원의 ‘갑질 6관왕’ 파문에 휩싸였다. 국민의당은 ‘김수민 리베이트’ 의혹으로 투톱(안철수·천정배) 체제가 붕괴됐다.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손 전 고문에게 돌아온 셈이다.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난 4월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56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분향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손 전 고문 등판은 단순한 정계복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더민주 8·27 전당대회 판세 영향은 물론 야권 발 정계개편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정계 복귀 후 대권을 차지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길이다. 반대로 ‘보수의 아이콘’이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처럼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의도에서는 손 전 고문과 이 전 총재의 대표적인 공통점으로 대권을 향한 ‘권력 의지’를 꼽는다. 손 전 고문은 2007년·2012년 대선 등 두 번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이번에 등판하면 ‘대권 삼수생’이다. 이 전 총재는 1997년·2002년·2007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다. ‘대권 삼수’에도 불구하고 여의주를 거머쥐지 못했다. 둘은 한국 정치의 최고 엘리트집단인 ‘KS’(경기고·서울대) 라인이다. 손 전 고문 측 관계자는 “겉으로 보이는 온화함과 권력 의지는 다르다”며 “손 전 고문에게는 새로운 진보, 새로운 복지, 통합 등 시대정신 구현을 향한 꿈이 있다”고 말했다.
보수 정권 9년을 집권한 ‘이명박(MB)·박근혜’ 대통령에게 밀렸다는 공통분모도 있다. 손 전 고문은 2007년 대선 당시 경쟁자였던 이들의 불공정 경선을 명분으로 탈당, 시베리아 벌판으로 나왔다. 2007년에는 MB, 2012년에는 박 대통령이 차례로 대권 종착지에 안착했다.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정계를 떠난 이 전 총재는 2007년 보수의 깃발을 들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자신이 서울시장 공천을 준 MB의 당선을 바라만 봐야 했다. 박 대통령이 중앙 정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7년 대선 당시 이 전 총재의 대구·경북(TK) 유세다.
대선 참패 후 이미지 변신에 나선 것도 비슷하다. 이 전 총재는 2007년 대선 때 점퍼 차림에 주먹을 불끈 쥔 채 연단에 올라 일장연설을 했다. 17대 대선을 한 달 앞둔 2007년 11월 3일 대구 재래시장에서 시민이 던진 계란 세례를 맞은 후 이어진 대구상공회의소 강연장에서 “조금 전 계란 마사지를 하고 왔다”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전 총재의 정치 잔 근육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17대 대선 당시 ‘저평가 우량주’ 평가를 받았던 손 전 고문은 100일 민심 대장정을 나섰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엘리트 이미지가 강했던 손 전 고문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농어촌과 탄광 등 전국 곳곳을 돌았다. ‘정치 쇼’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쇼를 하려면 손학규만큼 하라’는 긍정평가도 적지 않았다. 현재 그는 전남 강진 토굴에 칩거 중이다.
손학규 전 고문의 정치 등판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강진의 토굴에서 칩거하던 손 전 고문이 인근의 백련사로 점심공양을 나서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스타일은 다르다. 이 전 총재가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권력의지를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대쪽’이라면, 손 전 고문은 합리적 리더십의 ‘영국 신사’다. 이 전 총재가 ‘직선’에 가깝다면, 손 전 고문은 ‘곡선’이다. 1993년 감사원장에서 국무총리로 수직 상승한 이 전 총재는 이듬해인 1994년 4월 통일정책조정회의 관할 문제로 당시 ‘살아있는 권력’인 김영삼(YS)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전격 사표를 던졌다. ‘대쪽’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이쯤부터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3년 전 대선 킹메이커였던 ‘허주’ 김윤환을 토사구팽, ‘이회창 사단’ 등 친정체제 구축에 나섰다.
YS 권유로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인 손 전 고문은 같은 정치적 포지션에 있는 ‘살아있는 권력자’와 큰 충돌 없이 비교적 순탄한 정치 행보를 걸었다. 그가 대립각을 세운 인물은 반대편에 있거나 경쟁자에 국한됐다. 2005년 경기도지사 시절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향해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비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1년 뒤인 2010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 치러진 10·3 전당대회 직후 “인간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결례를 범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2012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는 ‘친노 패권주의’를 고리로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삶의 궤적도 차이를 보인다. 판사 출신인 이 전 총재는 평생 공직의 길을 걷다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등을 거쳐 보수정당의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3선(15대·16대·18대)에 불과했지만 한때 강력한 ‘이회창 대세론’을 만들었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의 ‘마지막 총재’를 지낼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손 전 고문은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과 조정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인방’으로 불렸다. 그는 빈민운동에도 투신했고 1980년 ‘서울의 봄’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보수정당에서 진보정당으로 몸을 옮겼다. 당내 경선 때마다 ‘한나라당 DNA’ 등 주홍글씨 논란에 휘말리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관전 포인트는 정계 복귀가 임박한 손 전 고문의 앞날이다. 거물급 정치인이 정계 은퇴를 번복한 대표적 사례는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이 전 총재가 있다. DJ는 정계 복귀 2년 만에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2007년 대선 때 ‘단기필마’로 나섰으나, 또다시 고배를 마신 뒤 4년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손 전 대표 앞에 ‘DJ의 길이냐, 이회창의 길이냐’가 놓여있는 셈이다.
당 내부에선 ‘부정론’이 우세하다. 4·13 총선 때 등판 기회를 놓치면서 애초 약점으로 꼽혔던 ‘결단력 부족’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이유에서다. 더민주 중진급 의원은 “대권은 ‘간을 보는 정치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며 “시대정신과 추진력, 진정성 등 삼박자가 갖춰져야만 대권에 올라탈 수 있다”고 말했다. YS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도 DJ의 유연함도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 리더십도 없이 대권을 차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비주류 한 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손 전 고문이 대선에 도전했던 2012년 때는 비주류 세력이 모래알 조직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안개와 같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이를 “정치 결사체로서 비노는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과거 야권 판의 경우 대권 잠룡이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기만 해도 자석처럼 세가 몰려들었다면 이제는 농부가 모종을 심듯이 오롯이 전력투구해야만 계파 구심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과연 당 밖에서 가능하겠느냐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었다.
손 전 고문이 정계 복귀 이후 대권에 도전한다면 당분간 야 3당 밖에서 ‘제4 신당’ 구축에 나설 공산이 크다. 호남과 수도권(지역)·중도 무당파(이념)·4060(세대) 표심 공략에 나서면서 새로운 길을 위한 진지구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무소속 지대에 있다가 외곽에 있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을 비롯해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와 더민주 비주류, 국민의당 일부 세력을 아우르는 ‘통합 중도신당’이 유력한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문제는 손 전 고문의 아킬레스건이다. 복귀 판의 물꼬는 트였다. 거대 두 야당이 비리 의혹에 휘말리면서 정치 혐오증이 극대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손학규 역할론’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손 전 고문의 장점이 분산되는 국면이다. 이미 중도층 포지션에는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과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가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합리적 이미지 몫도 반 총장과 안 대표가 나눠 가졌다.
호남의 맹주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양대 산맥을 구축한 상태다.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중도층’과 야권 핵심 지지층인 ‘호남’이 분열됐다는 얘기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대선 때 이인제 당시 국민신당 대선 후보의 독자 출마에 따른 여권 분열로 대권 고지를 선점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이회창 사단’ 구축을 위해 일부 민정계와 민주계를 축출했다. 이회창의 패배에는 언제나 여권 내부 분열이 있었다. 현재 야권은 분열 중이다. 손 전 고문이 이를 규합하는 ‘야권 발 빅텐트’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진보의 이회창’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윤지상 언론인
손학규 정계 복귀 신호탄은 <저녁이 있는 삶> 버전2 출간? 손학규 전 고문은 정계 복귀 시점에 맞춰 <저녁이 있는 삶>의 제2 버전을 출간할 예정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2012년 대선을 5개월 앞두고 출간된 ‘손학규의 민생경제론’의 총집합체다. 18대 대선 당시 자신의 슬로건이기도 한 <저녁이 있는 삶>은 당시 정치권과 전문가그룹,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진보적 자유주의 깃발을 한국 사회에 꽂았다. <저녁이 있는 삶>은 1부 ‘진보적 자유주의와 공동체 시장경제’, 2부 ‘정의·복지·진보적 성장을 위한 실천 방안’, 3부 ‘유럽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다’ 등으로 구성됐다. 손 전 고문은 이를 통해 공동체 시장경제론과 유럽의 길의 조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박정희 정권 이후 지속된 물질 만능론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경제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 2017년 대선에 앞서 출간하는 이번 책의 핵심은 ‘대한민국 대개조’다. 이 책에는 2013년 유학길에 오른 2013년 베를린자유대학 당시 본 독일의 연합정치(연정)에 대한 정치개조, 이른바 ‘87년 체제’ 극복을 위한 헌법 개정과 진보적 경제시스템 구축 및 남북관계의 혁신적 변화 등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1차 탈고 중이다. 출간 시점은 오는 8월 말∼9월 초다. 더민주 8·27 전당대회 직후가 가장 유력하다.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대한 손 전 고문 측의 공식적 의견 표명은 없었지만 사실상 책 출간이 정계 복귀의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앞서 손 전 고문은 6월 23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 ‘광주세계웹콘텐츠페스티벌‘ 개막식에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만나 정계 복귀를 시사하기도 했다. 김 대표가 “아니 서울은 언제 올라올 거예요?”라고 묻자 “하하, 이제 올라가야죠”라고 말했다. 한 달 전 광주에서 5·18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지지자를 만난 자리에서는 “국민이 새 판을 시작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광주의 5월은 그 시작”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간 ‘손학규 차출론’이 불거졌을 때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외쳤던 발언과 비교하면, 정계 복귀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더민주 한 보좌관은 “한 번(4·13)의 복귀 시점은 놓쳤지만 손 전 고문의 구원투수론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다만 손 전 고문이 구심점 없는 호남과 자신의 취약점인 2040세대에 대한 소구력을 발휘하느냐가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