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노무현 대통령이 던져 놓은 개헌 정국에서 가장 좋은 성적표를 받은 대권 주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로 볼 수 있다. 그는 노 대통령이 지난 1월 9일 오전 11시30분 국민 담화를 발표하자 약 30분 만에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이때 다른 주자들은 참모 회의를 소집해 한창 그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특유의 직관적인 감성 멘트를 날렸다. ‘참 나쁜 대통령’.
박 전 대표가 캠프 관계자가 노 대통령의 담화 소식을 전하자 사무실에서 언론과 인터뷰를 마친 뒤 던진 첫 마디였다. 민감한 이슈였지만 참모들과의 회의 절차 같은 건 없었다는 전언이다. 지난 5·31 지방선거 과정에서 테러를 당해 수술을 받고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물은 한마디로 지방선거의 분위기를 다잡은 위력을 이번에 다시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재철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도 이에 대해 “개헌과 관련한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의 반응 중 박 전 대표의 반응이 좋았다. ‘참 나쁜 대통령’이란 표현이 굉장히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여성적 감수성이 빛나면서 촌철살인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확 다가갔다”고 박 전 대표를 치켜세웠다.
박 전 대표의 ‘나쁜 대통령’ 한마디는 그 파장이 상당히 컸다. 노 대통령은 다음날인 1월 10일 박 전 대표의 멘트를 다시 거론해 반박할 정도로 그의 한마디는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다. 또한 여권도 “진짜 나쁜 대통령은 박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반박하며 각을 세웠다.
이 같은 ‘나쁜 대통령’ 논란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손해볼 것 없다는 평가다. 특히 박 전 대표는 ‘나쁜 대통령’ 발언 뒤 “(다음 대선에서는) 참 좋은 대통령 한번 만들어보자”는 후속타를 날려 연초부터 ‘나쁜-좋은’ 시리즈를 최대의 유행어를 만들었다는 평가다.
박 전 대표가 노 대통령 개헌 추진에 대해 강하게 반응한 반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경제 논리’로 평범하게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은 철옹성이다. 그는 현재 대권 주자 선호도 조사 1위, 한나라당 지지율 1위, 야당 집권 가능성 1위 등 여론조사의 ‘트리플 크라운’을 모두 거머쥐고 있다.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율도 개헌 정국 전과 크게 차이가 없다. 이 전 시장은 현재의 구도가 그대로 대선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웬만큼 큰 변수가 아니면 항상 차분하게 대응하자는 게 기본 원칙이다.
지지율 3위 고건 전 총리는 이번 개헌 정국에서도 ‘미지근한’ 태도를 보여 평균 이하의 성적을 올렸다고 할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개헌 제안 첫날인 9일 ‘찬성’ 입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 기자간담회가 끝난 뒤인 11일에는 “개헌 내용은 찬성하지만, 시기에 있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밝혀 당초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고 전 총리 특유의 행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개헌 제안 뒤 국민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가자 찬성에서 반대를 하기 위한 명분쌓기를 하는 것으로 오락가락 행보의 전형”이라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정치권에선 개헌 정국의 최대 피해자가 고 전 총리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고 전 총리가 개헌 정국에 대해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근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 등이 ‘선도탈당’ 가능성을 흘리고, 강봉균 정책위의장이 김근태 의장과 정책과 노선 갈등을 빚는 등 열린우리당 분열 가능성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신당을 추진하고 있던 고 전 총리에게 다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개헌론이 불쑥 튀어나와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이탈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개헌론에 정계개편 이슈가 묻힐 가능성도 커지면서 모처럼 신당 추진에 탄력을 받던 상황이 일거에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에 몰려 매우 난처한 입장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 전 총리로서는 개헌 정국이라는 난국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원내교섭단체 구성 및 독자신당 창당’이라는 카드를 과감하게 뽑아들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0여 일째 두문불출하며 정국을 ‘관망’만 하고 있는 그에게서 새로운 것이 나올지는 회의적이라는 해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