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아쉬움은 이 대회에 한국 최고 인기 프로 스포츠인 야구가 초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의 영광이 아직도 생생한 한국 야구팬들에게는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2012년 런던 대회와 올해 리우 대회까지 벌써 두 차례나 야구가 빠졌다.
다행히 개막을 앞두고 희소식이 들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제129차 총회에서 야구·소프트볼과 서핑, 스케이트보드, 클라이밍, 가라테 등 5개 종목을 2020년 도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야구가 12년 만에 다시 올림픽 무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잠시 멈췄던 올림픽 야구의 역사도 4년 뒤 다시 새 페이지를 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한국 대 쿠바 경기에서 3:2로 승리한 한국 대표팀이 그라운드에서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1894년 아테네부터 1912년 스톡홀름까지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시작됐다. 이 대회 육상 110m 허들에서 금메달을 따낸 토마스 커티스는 1932년 <스포츠맨>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공개했다. 그리스 왕세자 콘스탄티노스 1세와 동생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커티스와 만난 자리에서 “야구란 어떤 경기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커티스의 설명을 들은 두 왕족은 실제로 체험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왕세자가 포수, 왕자가 투수, 커티스가 타자를 맡았다. 야구공 대신 때마침 테이블 위에 있던 오렌지를 사용했다. 왕자가 던진 오렌지를 커티스가 지팡이로 받아쳤다. 오렌지는 허공 위에서 그대로 터져 버렸다. 과즙과 과육이 왕세자의 옷에 튀었다. 껄껄 웃는 왕세자를 바라보면서 커티스는 내심 ‘더 이상 그리스에서 야구를 볼 일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야구는 한동안 올림픽에서 배제됐다. 올림픽보다도 23년 빠른 1871년 미국에서 최초의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했지만, 야구가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등장한 건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로 알려져 있다. 그해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메이저리그 명투수 출신인 스포츠사업가 앨 스폴딩이었던 덕분이다. 그해 연감에도 6월 올림픽 기간에 야구 토너먼트 대회가 열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대회를 실제 올림픽 경기로 분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자체가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의 부속 행사처럼 치러졌다. 이 대회의 경기 상당수는 미국 선수들만 출전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다. 저명한 올림픽 역사가 빌 말론은 1904년 올림픽 리뷰에서 야구를 다루지 않았다.
야구는 1912년 스톡홀름 대회에서 마침내 공식 데뷔했다. 올림픽에 처음으로 ‘시범 종목’ 개념이 도입된 대회였다. 아이슬란드 전통 레슬링인 글리마와 함께 야구가 첫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 ‘미국의 국기’ 야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길 원했던 사업가 스폴딩의 뜻이 많이 반영됐다. 때마침 올림픽이 열리는 스웨덴에는 1910년 탄생한 야구팀이 하나 존재했다.
결국 미국과 스웨덴 두 팀만으로 올림픽 야구 경기가 열렸다. 물론 선수는 많이 모자랐다. 미국 야구 대표팀에는 참가를 자원한 육상 선수들이 포함됐다. 그런데도 스웨덴 팀과의 기량 차이가 컸다. 스웨덴 팀은 미국 팀에서 선수를 임대해 대회를 치렀다. 경기는 미국의 13-3 승리로 끝났다. 심판은 신시내티 유격수 출신인 조지 라이트가 맡았다. 그는 당시 65세였다. 훗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스폴딩은 미국이 이 올림픽에서 종합 1위(금메달 25개)를 차지한 뒤, 다시 한 번 야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다른 국가도 야구를 해야 미국을 따라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이후 1936년 베를린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올림픽에서 야구는 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개최된 1932년 LA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1936년 베를린부터 1964년 도쿄까지
야구는 베를린 대회에서 다시 시범 종목으로 채택됐다.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인 레슬리 만이 대회 조직위원을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트라이아웃을 열고 야구 국가대표 21명을 뽑았다. 당시 투수로 출전했던 빌 세일리스는 나중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도 했다. 원래는 미국 팀과 일본 팀의 대결로 계획됐다. 그러나 일본이 출전을 포기했다. 할 수 없이 미국 팀을 ‘월드 챔피언 대표’ 팀과 ‘미국 올림픽 대표’ 팀으로 나눠 7이닝 경기를 치렀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경기가 당시 야구 역사상 최다 관중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관중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덕분이다. 물론 야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잘 아는 관중은 많지 않았다. 당시 출전했던 한 선수가 “외야 플라이가 나오면 환호가 터지고, 적시 2루타가 나오면 조용했다”고 회고한 기록도 있다. 승리 투수인 카스 톰슨은 며칠 뒤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의 목소리 해설을 맡은 여성에게 오후 내내 야구 경기 규칙을 설명해줘야 했다. 그 여성은 아돌프 히틀러의 연인인 에바 브라운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 히틀러가 3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야구의 올림픽 역사에 다시 쉼표가 찍혔다. IOC 공식 리포트에는 “1940년 도쿄 올림픽 시범 종목에도 야구가 포함될 예정이었다. 미국과 일본 외에 중국, 필리핀, 하와이, 영국, 독일, 멕시코, 쿠바 등 9개국이 참가할 예정이었다”고 적혀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야구 경기를 치르기 위해 1938년 국제야구연맹도 창설됐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회 자체가 무산됐다.
이후 야구는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세 차례 더 시범 종목으로 선택됐다. 그러나 두 팀 이상이 겨룬 적은 없었다. 야구가 도입된 국가의 친선 경기 형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페사팔로’라는 이름으로 경기했다. 핀란드식으로 개량된 야구였다. 핀란드 내의 두 팀이 ‘피니시 베이스볼 리그’와 ‘워커즈 어슬레틱 페더레이션’으로 나뉘어 승부를 가렸다. 전자가 승리했다. 1956년 멜버른 대회와 1964년 도쿄 대회에선 미국과 개최국만 참가했다. 물론 호주와 일본은 미국에게 모두 패했다. 이때도 호주 경기에는 관중 11만 4000명이 몰려 다시 야구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대다수 관중이 경기 후반에 입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 경기 후 같은 장소에서 예정된 육상 경기 관람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다.
# 1984년 LA부터 2008년 베이징까지
야구가 올림픽에서 토너먼트 대회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1984년 LA 올림픽부터다. 20년 만에 다시 시범 종목으로 올림픽에 부활했고, 1988년 서울 대회까지 시범 운영됐다. 두 개의 디비전으로 나눠 예선전을 치른 뒤 조별 상위 두 팀이 메달 색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1984년에는 일본이 미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내는 이변을 연출했고, 대만이 동메달을 가져갔다. 1988년에는 다시 미국이 금메달을 탈환했다. 일본이 은메달, 푸에르토리코가 동메달이었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침내 정식 종목에 등극했다. 이 대회부터 모든 야구 경기가 올림픽 ‘공식’ 기록으로 남기 시작한 것이다. 경기 시간이 평균 3시간 안팎인 야구의 특성상, 올림픽 본선에는 8개국만 참가할 수 있었다. 지역 예선을 통해 올림픽에 참가할 5개국을 먼저 가리고, 이 예선에서 탈락한 국가들끼리 남은 3장의 티켓을 놓고 최종 예선에 참가한다.
예선에서는 라운드 로빈 형식으로 각 팀이 나머지 7개 팀과 모두 한 번씩 경기를 치른다. 그 가운데 4강을 가려내 1위와 4위, 2위와 3위 팀이 각각 준결승전에서 맞붙는 방식이다. 공식적으로는 아마추어 경기라 콜드 게임 규정도 있다. 7회 이후 10점 이상 점수 차가 나면 경기가 종료된다. 초기에는 선수들이 알루미늄 배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프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된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는 알루미늄 배트 사용이 금지됐다. 출전 선수 엔트리도 이때부터 24명으로 늘었다.
초반에는 아마 야구 최강국 쿠바의 전성시대였다. 1992년 첫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미국에 져 은메달로 밀렸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을 획득했다. 메이저리거들이 출전하지 않는 미국은 시드니 금메달 외에 애틀랜타 대회와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게 전부다.
한국은 1992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대회에선 대만이 은메달, 일본이 동메달을 수상해 아시아 야구의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한국도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하면서 올림픽 역사에 첫 발을 내디뎠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선 프로 선수들을 총망라한 ‘드림팀’이 출범해 사상 첫 메달(동메달)을 땄고,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선 준결승에서 일본, 결승에서 쿠바를 차례로 꺾고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야구는 이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올림픽에서 사라졌다. 2005년 7월 IOC 총회에서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를 2012년 런던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특정 종목이 한 번 올림픽에 편입됐다가 다시 빠진 것은 1932년의 폴로 이후 70년 만에 처음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메이저리거들의 불참이었다. IOC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올림픽 기간 동안 리그를 중단하지 않고 빅리거들의 올림픽 참가에 협조하지 않는 데 불만을 느꼈다.
‘각 종목 최고 선수들이 출전해 세계 최강자를 가린다’는 올림픽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또 야구가 극히 일부 국가에서만 인기가 있고, 경기시간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혔다. 결국 2012년 런던 대회와 올해 리우 대회는 야구 없이 열려야 했다.
다행히 2020년 올림픽 개최지인 일본은 야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야구의 인기가 높다. 개최지가 도쿄로 정해지자마자 야구의 정식 종목 재진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난해 9월 IOC에 야구를 포함한 5개 종목을 정식 후보로 추천했다. 결국 IOC는 6월 집행위원회에서 이 안건을 승인했다. 그리고 리우 올림픽 개막에 앞서 최종 통과됐다. 그렇게 다시 올림픽에서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됐다. 파란만장했던 야구의 올림픽 시계가 다시 돌아간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우커송에 태극기 휘날리자 태극전사들 눈가 촉촉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침체기를 겪었던 야구가 다시 국민적인 열풍을 일으킨 진원지였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케이블 TV를 통해 당시 장면이 종종 리플레이될 정도다. 한국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 처음으로 야구 대표팀을 파견했다. 당시에는 아마추어 선수들로만 대표팀이 구성됐다. 김선우, 손민한, 문동환, 임선동, 진갑용, 조인성, 이병규처럼 훗날 프로에서 내로라하는 스타가 된 선수들의 이름이 여럿 들어 있었다. 첫 올림픽 성적은 8위. 기대에 못 미쳤다. 하지만 4년 뒤 시드니 올림픽 선전의 초석이 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는 프로 정예 멤버들이 처음 참가했다. 선수단 23명 가운데 아마추어 선수는 동국대 박한이와 경희대 정대현뿐이었다. 한국은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정대현의 호투를 앞세워 접전을 펼쳤지만, 2-3으로 아쉽게 패했다. 대신 동메달 결정전에서 만난 일본을 통쾌하게 물리쳤다. 선발 구대성이 9이닝 5피안타 11탈삼진 1실점 완투승으로 일본의 ‘괴물’ 선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압도했다. 이승엽은 0-0이던 8회 2타점 결승 2루타를 쳤다. 김응용 당시 대표팀 감독은 대회 직후 “동메달보다 일본을 두 차례나 이겼다는 것이 더 기쁘다”고 했다. 명승부의 연속이었다. 그 영광도 잠시였다. 한국 야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과 대만에 일격을 당해 3위로 밀렸다. 그래서 2008년 베이징 대회 본선 진출은 8년간 품어온 숙원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완벽한 금메달’로 승화됐다. 베이징에 입성한 이승엽은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이 실제로 이뤄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씩 현실이 돼갔다. 류현진, 김광현, 김현수, 이대호와 같은 대표팀의 새 얼굴들이 주축을 이뤄 똘똘 뭉쳤다. 예선 7경기를 다 이기는 파란이 이어졌다. 쿠바, 일본, 미국을 모두 꺾었다. 준결승에서는 일본을 만났다. 8회 이승엽의 결승 2점포가 터졌고, 김광현이 8이닝 2실점으로 역투했다. 결승에선 ‘디펜딩 챔피언’ 쿠바를 상대했다. 이승엽이 선제 결승 2점 홈런을 쳤고, 선발 류현진이 8.1이닝 2실점으로 역투했다. 석연찮은 볼 판정이 만들어낸 1사 만루에선 정대현이 극적인 유격수 병살타를 솎아냈다. 한국 남자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 베이징 우커송 구장 하늘에 태극기가 올라가는 순간, 태극마크를 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선수들의 눈가마저 젖어 들었다. 그리고 이 영광은 결국 프로야구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그 후 12년이 흐른 4년 뒤 도쿄에서는 어떤 명장면이 펼쳐질까.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