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올해 2월에는 최윤수 당시 3차장검사가 국정원 2차장 자리에 깜짝 발탁됐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정기 검찰 인사로 부산고검 차장검사(검사장)로 승진된 최윤수가 며칠 뒤 국내 정보 수집 및 관리를 총괄하는 국정원 2차장으로 간 것은 정권 후반 청와대의 정보 장악력을 한층 강화하려는 ‘우병우의 뜻’이 반영된 결과”라는 말이 많았다.
‘우병우 사단’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물밑에서 위세를 떨치던 우 수석은 7월 18일 뜻하지 않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조선일보>는 7월 18일자 1면에 우 수석 처가의 부동산 매매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주요 언론들은 ‘우병우’라는 이름을 매일같이 보도했다. 아들 의경 보직 특혜, 가족회사 자금 횡령 등 우 수석에 대한 갖가지 의혹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면서 결국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현직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대상이 되는 초유의 사태에서도 우 수석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우 수석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지만 수사를 받는 사람이 수사 상황을 보고 받는 위치에 버티고 있는 기형적 형국을 고수하고 있다. ‘리틀 김기춘’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단기간 내 청와대 실세로 자리매김했고, 현재는 ‘대통령의 남자’로 불리며 태풍 속 무풍지대에 서있는 우병우, 그는 누구일까.
우병우 민정수석. 연합뉴스 사진 합성.
# ‘소년등과’ 우병우, 엇갈리는 평판
우 수석은 1967년 1월 28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교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 우 수석을 따라다니는 수식어 중 하나가 ‘소년등과(少年登科 :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지난 1987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만 20세였다.
1990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그가 검사로 임관할 때 성적은 2등이었다. 그는 초임을 서울중앙지검에서 보냈다. 법조 관계자는 “우 수석은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만큼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감 있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주변을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그래서 젊은 시절 우 수석에게 ‘깁스’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 수석의 검사 시절 평판은 일관된다. ‘업무 능력은 최고지만 인간적인 관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평이다. 우 수석은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와 형사6부를 거쳐 대구지검 경주지청, 창원지검 밀양지청, 제주지검 등에서 근무했다(1990∼1998). 이 시기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 업체 55곳에 이어 세균폐수를 방출한 을지병원·백병원·차병원·중대부속병원을 적발했다. 특히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경주대 설립자인 김일윤 전 민자당 의원을 학교공금 53억 원 횡령 혐의로 구속해 주목받았다.
우 수석과 함께 근무를 했던 전직 검찰 관계자는 “우 수석은 피의자를 소환해서 조사할 때 사적인 말은 일체하지 않는다”며 “수사에 있어서도 장난을 치는 법이 없고 완벽을 추구하는 독종”이라고 평했다.
# 로비 통하지 않는 특수통, 강단 버린 처세술?
우 수석은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로 접어든다. 법무부 국제법무과(1999)를 거쳐 지난 2001년 서울 동부지청 형사6부에 배치됐던 그는 2001년 12월부터 송해운, 윤대진 검사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차정일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활약했다. 참여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가장 인정받는 특검으로 평가되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은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 동생을 구속하며 신 총장의 조기퇴진을 가져왔다.
우 수석은 ‘로비’가 통하지 않는 검사로도 유명했다. 2003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부부장 시절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우 수석은 사적인 만남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삼성그룹은 특수2부 부장검사부터 평검사까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붙였지만 유독 부부장이던 우병우만 삼성그룹 사람들을 절대 만나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이 회자됐다.
우 수석은 수사 솜씨에 있어서 누구보다 탁월했지만 윗선과의 갈등은 최대한 피하는 성격이라는 평도 받는다. 월등한 능력에 비해 강단은 다소 부족한 검사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성향이 ‘상명하복’과 ‘검사 동일체 원칙’으로 돌아가는 검찰 조직 문화에 특화된 ‘처세술’로 작동했다는 해석이다.
우 수석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대구지검 특수부장 때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의 수뢰 사건을 수사했다. 앞서 같은 사건에 연루된 전 한나라당 의원을 1억 원 수뢰 혐의로 구속한 상황이라 배 의원 구속영장 청구가 점쳐졌다. 당시 우 수석은 배 의원에 대한 구속 수사 의견을 올렸지만, 불구속 수사 지시를 내린 검찰의 고위 인사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우 수석은 배 의원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한 뒤 다음 인사에서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장으로 영전했다.
# 노무현, 그리고 권력에 대한 좌절과 갈망
검찰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우 수석은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로 브레이크가 걸린다. 지난 2008년 12월 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를 구속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009년 초 검찰 정기인사에서 대검 중수1과장 자리에 우 수석을 앉혔다. 우 수석은 2009년 4월 30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노 전 대통령을 대검 청사 11층에 마련된 특별조사실에서 직접 조사했고, 노 전 대통령은 5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은 사표를 냈지만 수사 실무를 맡았던 우 수석까지 책임론이 당장 밀려오지는 않았다. 다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무리한 수사에 일조했다는 이력은 이후 검사의 꽃인 검사장 승진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 수석은 인천지검 부천지청장과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을 거친 뒤 지난 2013년 5월 검찰을 떠났다. 2012년과 2013년 두 해에 걸쳐 검사장 승진에 실패하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검찰 출신 정치권 관계자는 “특수통 검사로서 앞길이 밝았는데 노 전 대통령 수사에 참여했다는 점이 검사장 승진을 어렵게 했던 것으로 안다”며 “이런 좌절은 권력에 대한 갈증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화위복, 권력 심장부로 화려한 복귀
우 수석은 2013년 5월 우연히 ‘홍만표 법률사무소’가 10층에 위치한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에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변호사 우 수석은 모교가 있는 영주의 재경 향우회에 얼굴을 내미는 등 정계 진출을 염두에 둔 듯한 행보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 수석은 변호사 개업 1년여 뒤인 2014년 5월 청와대 개각에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는 법조계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인사였다. 그만큼 우 수석 청와대 입성을 두고 다양한 추측이 제기됐다. 정윤회 씨는 물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배경으로 거론됐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없었다. 다만 뒤이어 6월에 임명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은 변호사 시절 우 수석과 함께 ‘도나도나 다단계 사기사건’을 수임한 인연이 있다.
우 수석이 검사장을 거치지 못했기에 발탁됐을 수도 있다는 추측도 들렸다. 박 대통령이 정권 초기부터 철저한 기수문화로 ‘그들만의 리그’를 꾸려온 검찰 조직을 흔들겠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현 정부 첫 민정수석인 곽상도 전 수석(56·연수원 15기)도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56·연수원 14기)이나 황교안 법무부 장관보다 후배였고, 검사장을 거치지 못했다.
# 실세에서 순장조까지, “청와대는 우병우를 내치지 못한다”
우 수석은 청와대에서 일을 하며 김기춘 전 비서실장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 등 까다로운 일들을 깔끔히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문서유출 사건 당시 우 수석은 상관인 김영한 전 수석을 제치고 김 전 실장에게 직보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우 수석은 청와대 입성 8개월 만에 대통령실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승진했다.
우 수석은 현재 누구보다 유력한 박근혜 대통령 순장조로 꼽힌다. 우 수석 본인의 충성심도 있을 테지만 현 권력이 그를 내치기 어렵다는 현실론에 힘이 실린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관계자는 “현재 우 수석은 대통령도 무시 못 할 힘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그의 힘의 원천은 정보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과거 참여정부 시절에는 국정상황실이라는 시스템으로 국내 정보가 관리됐는데 현재는 민정수석이라는 사람이 국내 정보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이승환 파이낸셜 뉴스 기자
처가 재산 얼마기에…상속 받은 것만 수천억대 우 수석은 검사 때부터 ‘재력가 사위’로 불렸다. 우 수석은 초임 검사 시절 고(故) 이상달 회장의 네 딸 가운데 한 명과 결혼했다. 이 회장은 30세에 회사(약수건설)를 설립했다. 1976년 삼강중장비 대표이사와 1989년 삼남개발 대표이사를 역임한 후 1992년 대한중기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어 이 회장은 1994년 정강중기 대표이사에 이어 1998년 대한건설기계안전관리원 이사장까지 역임했다. 지난 2008년 6월 장인 이 회장이 사망하고 2개월 뒤 아내 김장자와 딸 넷 등 5명은 SD&J홀딩스(기흥CC의 운영사인 삼남개발의 대주주)를 설립해 자신들의 지분을 회사 소유로 돌렸다. 이들은 지분을 각각 20%씩 나눠 가졌다. SD&J홀딩스 자산총액은 토지를 포함해 1967억 원에 이른다. 이 회장의 네 딸은 강남역 인근의 부동산 1020평도 상속 받았다. 우 수석 부부는 부동산 임대 업체 3곳의 주식도 물려받았다. 이렇게 이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우 수석 처가의 재산은 부동산과 주식 등을 합쳐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발탁된 직후 우 수석이 신고한 재산은 423억 3230만 원이다. 여기에는 본인과 부인 명의 예금 183억 2077만 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196.7㎡) 등 건물 66억 8651만 원, 사인간 채권 165억 8051만 원 등이 포함됐다. 100만 주에 가까운 해외국채(99만 5000주)도 보유하고 있다. 우 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대개 우 수석 처가의 막대한 재산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특히 ‘우병우 사태’의 시발점이 된 넥슨과의 서울 강남 부동산 거래에서는 매매가액이 1300억 원대에 이르는 처가 보유 건물이 등장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찰 수사가 우 수석 처가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이 우 수석 본인에 대한 비리 혐의보다 처가 쪽 탈세, 횡령 의혹에 무게를 두면서 ‘꼬리자르기식 수사’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법조계 관계자는 “우 수석 처가 쪽 혐의는 구체적인 정황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검찰의 기소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 수석 본인 문제는 혐의 입증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검찰이 현직 민정수석에 대한 수사 의지가 얼마나 있는지에 달렸다”고 말했다.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