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40년지기로 알려진 최순실 씨(개명 후 최서원) 관련 파문이 정국을 뒤덮고 있다. 양파껍질처럼, 고구마줄기마냥 하루꼴로 새로운 의혹이 등장한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더블루케이, 고원기획 등을 두고 휘슬블로어(내부고발자)들이 등장했다. 최 씨의 딸 정유라 씨(개명 전 정유연)를 둘러싸곤 이화여대 특혜입학 의혹에다 학점 이수를 둘러싼 각종 제보, 담당교수들의 이해할 수 없는 감싸기나 친절함 등도 새롭게 터지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 파문으로 여당이 종북몰이를 하고 있음에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와 새누리당 정당지지율은 모두 하락세다. 친박계의 깊숙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치권 인사는 앞서 이렇게 전제한 뒤 “최순실 의혹 기사나 보도에 박 대통령의 가방이나 옷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고정 지지층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된다”며 “사실상 고정지지층, 즉 TK와 60대 이상 연령층에선 최태민, 최순실, 정윤회 정도의 이름은 대부분 알고 있으니 사실 확인이 되는 순간 거대한 지지 철회 쓰나미가 몰려올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왼쪽)와 전 부인 최순실 씨가 2013년 7월 19일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제공=한겨레
알려지진 않았지만 최근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 10여 명이 모처에서 만찬 회동을 가졌다. 20대 국회 첫 정기국회에서의 예산안 심사를 논하고 첫 국정감사를 마무리한 것을 서로 치하하고 격려하기 위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관계 재정립,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사태에 이은 최순실 의혹과 관련한 의견 교환 내지는 대책 마련, 혹은 BH의 의중과 하달이 이뤄지지 않았겠냐는 해석에 더 힘이 실렸다.
하지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던 의원들은 회동 자체를 처음에 전면 부인하다가 크로스 체크가 이뤄지니 회동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통상적인 자리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 의원은 “국정감사가 무사히 끝난 것, 눈에 띄는 의원들이나 질의들에 대해 가볍게 식사하며 이야기하는 자리였다”고 했고, 한 중진 의원은 “언론인들이 궁금해 할 정치 현안은 한마디도 없었다. 오랜만에 서로 안부를 묻고 식사했다”고 했다.
입을 맞춘 듯한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장시간 지속되었다는 전언이 잇따랐다. 그래서일까. 회동이 있고나서 친박계 김태흠 의원은 오랜만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순실 씨와 대통령이 과거 친분 관계가 있다고 해서 이를 권력형 비리로 연관 짓는 것은 정치공세로 정권 차원의 비리가 아니므로 국회가 나설 일이 아니다”라며 “대통령이 그런 것을 시켰겠냐. 자기 동생이나 자기 조카들도 잘 안 만나는 단호한 분”이라고 비호했다.
다른 친박계 의원들도 삼삼오오 정치부 기자들과 만나 김 의원과 비슷한 견해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동과 친박계 행동 사이의 연관관계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친박계는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를 느슨하게 가져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자칫 ‘최순실 게이트’로까지 옮겨 붙을 수 있는 길목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친박계 한 관계자는 “최경환, 윤상현, 홍문종 등 핵심들이 수면 위에서 움직이면 많은 해석을 낳기 때문에 참 조심스러운 시기”라고 전했다.
이렇게 친박계 내부가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를 보이는 것은 대선을 앞둔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친박계가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를 검증했기 때문이란 풀이도 있다. 40년지기로서 둘의 관계를 친박계가 더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최 씨에 관한 비위나 비리가 드러날수록 친박계가 더욱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다는 얘기다.
2007년 경선 캠프 당시 최 씨는 몇 차례 걸쳐 그와 박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소명했다고 전해진다. 소명자료를 제출하는가 하면 일부 캠프 관계자들은 직접 그를 만나 세간에 떠돌고 있는 이야기들을 질답하고 사실관계를 따로 파일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자료는 캠프에 보관됐으며 일부는 2012년 대선에서도 검증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전해졌다. 상대 후보의 의혹 제기가 있을 때 쓰려고 미리 확인 작업을 마쳤다는 것이다. 실제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캠프는 여러 의혹을 제기했고. 국정원이 가지고 있던 박근혜 관련 파일을 그대로 공개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알고 있는 원조 친박계 내지는 친박 핵심들은 오로지 소나기가 비켜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다만 당시 중책이 아니었던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정도가 ‘검찰 수사’를 운운하고 있을 뿐 지금까지 알 만한 친박 핵심들은 최순실 의혹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의혹이 어느 선까지 나올지 예의주시하며 향후 행동의 항로를 결정해야 할 궁지에 몰린 모습이다. 지지율이 20%대에서 더 떨어져 레임덕에 빠질 경우엔 친박 내부의 반란까지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정가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반면 최순실 의혹이 제기된 시기가 공교롭다. 20대 총선 공직선거법 공소시효는 10월 13일부로 종료됐다. 새누리당 의원 11명(배우자나 캠프 관계자 포함)이 기소돼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사실상 빗장이 풀린 셈이다. 이는 비박계 의원들의 입지를 다소 넓혀주는 효과로 이어졌다.
비박계 대표격인 김무성 전 대표는 “특별검사를 수용하는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김 전 대표의 최측근인 김성태 의원은 “비선실세로서 국정을 농단했다면 단죄를 받아야 한다”고 김 전 대표를 거들었다. 나경원 의원은 “우병우 민정수석은 진작 사퇴했어야 하며 최순실 의혹은 청와대가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병국 의원은 “집권여당이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들을 앞장서서 막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 국민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줬다. 빨리 털고 갈수록 대통령이 부담을 던다”고 말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최순실 의혹은 청와대가 속시원하게 해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른바 비박계의 합창이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최 씨에 대해선 검찰 수사를 촉구하면서도 우병우 수석에 대해선 말을 아끼며 재신임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찾는 고도의 정치행위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상 검찰을 장악하고 있는 우 수석이 있는 한 최 씨가 수사를 받는다고 해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검찰이 비박계와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선거 관련 기소를 하고도 협박 녹취록까지 나왔던 최경환, 윤상현, 현기환 등은 불기소한 것이 단적인 예로 회자되고 있다. 한 비박계 인사는 “우 수석을 지금껏 비호해 왔다는 것은 끝까지 안고 가겠다는 것”이라며 “최순실 의혹뿐 아니라 송민순 회고록 파문까지 일면서 우 수석의 역할이 더 커져가고 있다”고 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