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룡 의원 | ||
먼저 왜 이·박 두 후보가 김덕룡 의원(DR) 영입을 놓고 숨 막히는 대결을 펼쳤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치적 가치’를 따져보는 게 순서다.
한나라당에서 DR이 갖는 의미와 힘은 그가 한나라당 내 유일무이한 호남 출신의 5선 중진 의원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선 선거인단 18만 4709명 가운데 62%가 대의원과 당원이다. 이들 대의원과 당원은 한나라당의 중심세력이다. 이들은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 지지자를 투표장으로 끌고 오는 핵심 선거운동원이기도 하다.
더구나 DR은 한나라당에서 유일한 호남의 중진이다. 그것도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든 경험이 있고, 자기 조직이 있는 중진이다. DR이 이 전 시장을 선택하는 순간 이런 정치적 자산이 이 전 시장의 지원군으로 변했다. DR이 이 후보 지지를 선언한 지난 23일 민주산악회 회원과 전 국회의원과 지구당위원장, 지방의회 의원 등 221명이 함께 이 후보 지지에 동참했다. 이른바 ‘DR계’로 분류되는 현역 당원협의회장도 10여 명에 이른다.
한나라당에서는 호남에서 ‘통’할 수 있는 ‘어른’을 DR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때문에 DR의 호남 영향력에 대해서는 당내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잖아도 호남에서 밀리던 박 전 대표 측으로서는 DR이 이 전 시장 캠프로 걸어 들어간 사실을 치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전북 익산 출신인 DR은 경남 남해 출신인 박희태 의원과 함께 이 전 시장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이 전 시장으로서는 영·호남을 완벽하게 조화하는 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박 전 대표 캠프에서도 DR의 이 같은 ‘호남 공략 효과’를 상쇄하기 위해 3선 출신인 김원길 민주정우회 회장을 영입했다. 민주정우회는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을 만든 호남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단체다. 김 회장은 민주당 지역운영위원장과 도의원 등 505명을 이끌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두 번째는 한나라당 내 민주계 좌장으로서 DR이 가지는 상징성이다. 이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전 시장 지지를 표명한 상태에서 서청원 전 대표와 김무성 전 사무총장, 이성헌 전 사무부총장 등을 빼면 대다수의 민주계 인사가 이 전 시장 측에 포진해 있다. 따라서 DR의 이 전 시장 캠프행은 민주계의 이 전 시장 지지를 완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세 번째는 박 전 대표 측으로서는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됐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DR은 원내대표 당시 박 전 대표와 손발을 맞춰온 인물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DR이 장기간 중립지역에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해 박 전 대표와의 ‘인연’을 고려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전 시장을 선택했다. 같은 맥락에서 박 전 대표의 ‘입’이라거나 ‘복심’이라고 불렸던 전여옥 의원이 이 전 시장 지지를 선언한 사실과 맞물려 박 전 대표의 정치력이 의심받는 상황으로 몰리게 됐다.
두 진영의 ‘DR 잡기’ 경쟁은 상도동에서 시작됐다. 상도동의 한 관계자는 “DR을 끌고 가기 위해 (양쪽이)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심지어 (양쪽 진영에 있는 민주계 인사들이 서로 DR을 영입하겠다고) 어른(김영삼 전 대통령)을 뵙고 사정을 했다”고 전했다. 이·박 양 진영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 전 시장 측에서는 이 전 시장을 비롯해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 의원 등 캠프 지도부는 물론 민주계인 박종웅 전 의원, 안경률 의원 등이 DR을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시장과 DR이 6·3동지회 회원이자 동갑내기 친구사이라는 점에서 보면 DR의 선택이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박 전 대표 쪽에 이 전 시장의 ‘40년지기’인 홍사덕 전 의원이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게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 전 대표 측에서는 민주계인 서청원 홍사덕 전 의원과 김무성 의원이 DR 설득작업에 나섰다. 박 전 대표 측의 DR 영입작전은 이 전 시장 측을 압도할 정도로 ‘정밀’했었다는 후문이다. 상도동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 측은 DR의 인맥을 파고들었고, 심지어 친인척을 통해 동참을 호소했다”며 “DR이 사실 ‘고민’한 부분이 바로 그 것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전 시장 지지선언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 2월경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박 진영의 DR 영입작전이 이 전 시장 쪽으로 기울게 된 시점은 한 달 전쯤이라고 한다. 당시 민주계 인사들이 대거 이 전 시장 캠프로 몰려들자 ‘체면’이 구겨진 서청원 전 의원이 상도동을 찾았다. 목적은 민주계의 일방적인 이 전 시장 지지 흐름에 대한 부정적 의견 전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거의 유일하게 중립지역에 있던 DR 영입에 공을 들이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보면 ‘협조 요청’도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 의원은 그날 상도동에서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뒤 DR은 이 전 시장 측 인사들이 주최하는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이 전 시장이 지지도 1위 후보이고, 수도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현실적 기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없지는 않다. 전여옥 의원 역시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공천을 고려한 선택이 아니냐는 의문이 따라다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정기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