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7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단 간담회를 마치고 나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황창규 KT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당시 CJ그룹 회장, 김창근 SK그룹 SUPEX추구협의회 의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박용만 당시 두산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권오준 포스코그룹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 조현상 효성부사장 등 대기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연합뉴스
[일요신문] 미르와 K스포츠 재단으로 야기된 ‘비선실세’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 파문이 온 나라를 휘감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두 번째 대국민 사과를 했고,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최순실 특검’ 문제도 탄력을 받고 있다. 급기야 비선실세를 향한 사정 칼날은 최 씨를 비호한 의혹을 받고 있는 재계에까지 확전되는 등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최 씨의 딸 정유라 씨(개명 전 정유연)에 이어 최 씨의 조카 장시호(개명 전 장유진) 씨를 둘러싼 각종 의혹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삼성 등 일부 대기업은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초긴장 모드에 접어들었다. 들끓고 있는 민심 앞에 권력과 대기업 간의 전형적인 ‘정경유착’이라는 도덕적 비난과 함께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불똥이 재계로 튀고 있는 내막을 들여다봤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는 지난 3일부터 두 재단에 출연한 기업 관계자들을 차례로 불러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자금을 출연한 기업 53곳으로 이들 기업은 두 재단에 800여억 원대 기금을 출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은 두 재단에 125억 원과 79억 원씩 총 204억 원을 기부했다. 현대자동차(128억 원) SK(111억 원) LG(78억 원) 포스코(49억 원) 롯데(45억 원) GS(42억 원) 한화(25억 원) 등도 적잖은 돈을 출연했다. 검찰은 재단 설립과 기금 출연 과정에서 최 씨 측이 청와대를 앞세워 압력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지난달 28일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을 조사하면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모금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미 롯데와 SK그룹 임원을 불러 조사했으며 국민·신한·우리·농협은행 등 시중은행 본사도 압수수색했다.
관련 의혹의 정점에는 삼성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은 두 재단 외에도 최 씨가 독일에 세운 비덱스포츠 측에 280만 유로(약 35억 원)를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돈은 정유라 씨의 승마용 말 구입비 등으로 쓰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차원의 자금이 전방위로 흘러들어간 모양새다.
검찰 관계자는 “삼성에 대해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K스포츠재단 등을 거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최 씨 측에 돈을 건넨 곳은 삼성뿐”이라고 설명했다.
최순실(좌)과 정유라(우) 사진=연합뉴스
특히, 삼성은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승마선수 커리어 활동을 도왔다는 이야기로 이미 한 차례 몸살을 앓았다. 삼성은 정씨에게 최고급 말과 독일 현지 승마 훈련비 등을 지원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삼성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지만, 최근까지 대한승마협회에 등록된 정 씨의 프로필에 ‘팀 삼성(Team Samsung)’이라고 적시돼 있는 것은 물론 정 씨가 주변에 삼성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해 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의혹은 증폭되고 있다.
현재 대한승마협회 회장이 지난해 3월 취임한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이란 사실도 특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부터 이재용 부회장까지 승마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승마 활동을 후원했다고는 설명했다. 하지만 국정감사를 통해 드러난 2020 도쿄올림픽 승마 프로젝트를 위한 장기적인 후원을 준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대한승마협회 로드맵에는 정 씨 훈련을 지원하기 위한 삼성과 마사회의 구체적인 역할분담 방안이 들어 있었다는 마사회 내부 인사의 증언도 검찰이 확보한 상태다.
삼성 측은 “검찰 조사 중인 사항으로 성실하고 책임 있는 자세로 조사에 응할 것이다. 모든 사실은 검찰의 공정한 수사로 밝혀질 것”이라며 사안별 구체적인 즉답은 피했다.
한화그룹도 승마와 연계해 최 씨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고 있다. 김승연 회장의 3남 김동선 씨가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올림픽 출전까지 한 실력파 승마선수인 만큼 최 씨 모녀 등과 자연히 접촉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삼성 관계자가 승마협회 회장을 맡기 이전 회장은 차남규 한화생명 사장이었다.
정 씨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자격 논란이 있을 때에도 승마협회 개입설이 제기된 바 있다. 다만 당시에는 정 씨의 아버지이자 최 씨의 전 남편인 또 다른 비선실세 정윤회 씨가 거론됐지만, 정 씨는 결국 국가대표로 뽑혀 아시안게임에 나가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선 4명의 대표선수 중 상위 3명의 선수 점수로 순위가 매겨지는 만큼 당시 아시아랭킹 상위를 휩쓸고 있던 한국대표팀에 어느 누가 들어가도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한화 황태자와 한화그룹이 물심양면으로 승마를 지원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 회장이 지난 광복절 특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미 집행유예로 공식적인 경영권 외에 경영활동 및 사회활동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있다는 점도 유착설을 부추기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해 5월 한화가 지원하는 충남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 회장이 함께 참석하는가 하면 올해에도 정부 관련 행사에 김 회장이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한화그룹은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모두 25억 원을 지원했다. 이밖에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지속적으로 지원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250억 원을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 과정에 비선실세인 최 씨가 개입돼 있는게 아닌지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한화케미칼이 박 대통령의 친인척 관련 회사 등과 함께 ‘원샷법 1호’ 기업에 선정된 배경도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태다. 또한 한화는 면세사업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한화갤러리아 면세점 특허를 취득해 사업부문을 넓히고 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한화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화 관계자는 “오비이락이다. 우연한 시기 외에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이어 “승마협회장도 마사회나 협회 등의 간청으로 맡았을 뿐이지 특혜나 최 씨 모녀 등과는 전혀 무관하다. 원샷법 역시 단순 의혹일 뿐이다. 김 회장이 박 대통령과 초등학교(장충초) 동창이고 김동선과 정유라가 함께 대표팀에 소속되었을 뿐, 최 씨 관련 각종 의혹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강제모금 의혹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정책조정수석(오른쪽)과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왼쪽). 연합뉴스
GS그룹 역시 검찰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전경련 회원사들이 774억 원을 갹출한 과정을 파고들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안 전 수석의 지시를 받아 이승철 부회장이 기업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과정에서 전경련 수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회장에게 보고됐는지 여부는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CJ그룹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최근 CJ그룹은 경기도에 1조 4000억 원을 들여 한류 테마파크 ‘K컬처밸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최 씨의 측근으로 알려진 차은택 씨가 개입한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K컬처밸리는 차 씨가 주도한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의 일환이다. 이에 CJ그룹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K컬처밸리사업 투자의향서가 체결되는 시기가 이재현 회장이 1600억 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던 시기와 묘하게 겹친다는 점에서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이 회장의 구명을 위해 CJ가 비선실세가 추진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SK그룹은 K스포츠 측에 비인기 종목 지원을 위해 80억 원을 내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가 3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역제의 했다는 의혹을, 롯데그룹은 비자금 관련 검찰 수사 직전에 미르·K스포츠재단에 70억 원을 추가 지원했다가 돌려받은 사실 등이 드러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한편, 이들 대기업들은 당초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강제모금’에 동원됐다는 논란에 휩싸인 것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면서도 정작 청와대나 비선실세 최 씨 측의 강요는 없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강제모금을 주도한 의혹을 받고 있는 안종범 전 수석과 이승철 부회장이 기존 진술을 번복하면서, 기업들만 눈치를 보는 상황으로 돌변하고 있다. 따라서 박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검찰수사 과정에서 ‘선 긋기’를 시도하고 있는 만큼 이들 기업들의 입장이 번복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어쨌든 대기업들이 강제든 자발적이든 비선실세가 개입된 재단에 거액의 돈을 출연한 사실은 권력과 재벌 간의 유착관계가 여전함을 방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적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
“VIP 뜻” 내세워 오너 일가 경영권 관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가 재계로 확대된 가운데 일부 기업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가 오히려 압박과 보복성 조치를 당한 것 같다며, 검찰 수사를 주시하고 있다. 외부에 공개된 K스포츠재단 회의록에 따르면, 황은연 포스코 사장은 지난 2월 K스포츠재단 측으로부터 배드민턴팀 창단을 제안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포스코 측은 이후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등 청와대 측으로부터 재차 압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포스코 측은 바둑과 축구단 운영으로 추가적인 스포츠단 운영에 난색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영그룹 역시 부당한 자금 지원을 요구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K스포츠재단 측은 부영 측에 하남 지역에 대한 지원을 명목으로 70억~80억 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이중근 부영 회장은 부당한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세무조사 무마’를 제안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결론적으로 지원금은 최순실 씨의 거절로 이뤄지지 않았고, 현재 부영 측은 세무조사 무마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의혹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 청와대 측이 재계 오너 일가의 경영권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3년 말 청와대 핵심 수석이 CJ그룹 고위 관계자에게 “VIP(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라며 “수사까지 안 갔으면 좋겠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재계 일각에서는 현 정권이 이른바 ‘삥뜯기’도 모자라 오너 일가 자리까지 좌지우지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