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 8월 경선이 끝난 뒤 지인으로부터 장편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일본 전국 시대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 역정을 그렸는데, 여의도에선 정치인의 필독서로 불릴 만큼 인기가 높다. 특히 그의 라이벌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어라”라는 말로 비유되는 공격적인 성향을 가졌던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저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내’의 정치인으로 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경선에서 ‘석패’했던 박 전 대표로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책을 읽으며 와신상담하며 차차기 대선을 기약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박 전 대표가 이재오 최고위원의 ‘좌시하지 않겠다’라는 발언에 대해 ‘오만의 극치’라는 짧은 한 마디를 내던진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의 ‘기다림’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사실 그가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 것도 다음 대선을 향한 장기적인 초석 쌓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승자를 향한 예우를 생각해 그동안 일체의 정치적 언급을 자제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 측이 계속해서 박 전 대표의 측근들을 철저히 왕따시키는 전략을 취하자 그로서도 더 이상 밀릴 경우 세력의 존폐가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동안 숨겨 논 발톱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 전 대표가 장기적으로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스타일이지만 현재의 대선 국면도 ‘그때’를 대비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보고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설까지 나오자 이 후보와의 사이에서 박 전 대표가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여력마저 생기게 됨으로써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이명박 후보 사정을 잘 아는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이 전 총재 문제에 관한 한 이 후보 측이 굉장히 자신이 있는 것 같이 얘기하는 것 같다. 일단 그의 출마에 대해 보수세력 분열의 당사자이고 ‘제2의 이인제’라는 꼬리표를 얹어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지난 대선 때 이 전 총재 곁을 지키던 중진 측근 의원들이 대선 잔금 등에 대해 천기누설을 할 경우 이 전 총재는 한마디로 ‘간다’고 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박 전 대표는 그동안 당내 인사문제와 관련해 불만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렸다. 이 후보가 스스로 ‘뺄셈의 정치’에 대한 문제를 인식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 친박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를 지지하던 실무자들이나 의원들은 최근 이 후보 측의 독단적인 전횡과 화합에 대한 진정성 결여에 대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입장을 생각해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박 전 대표가 우리 입장을 모르겠는가. 이번에 박 전 대표는 ‘오만의 극치’라는 짧은 한 마디로 이 후보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년 총선전에 모두 나가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게 우리와 박 전 대표 생각이다. 박 전 대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 후보가 과연 승리할 수 있을지는 이번 이 전 총재 출마 논란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박 전 대표가 이미 이 후보와의 ‘공조’를 포기했다는 성급한 추측도 내놓고 있다. 일부에선 박 전 대표의 이례적인 극한 표현에 초점을 맞춰 이미 이 후보와 분명한 거리두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도 한다. 김무성 의원의 최고위원 임명에 대해 “너무 늦은 것”이라며 화합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단 반응을 보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여간해선 직접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 박 전 대표가 ‘오만의 극치’라는 과격한 표현을 쓴 것도 이런 논리를 뒷받침한다.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이미 박 전 대표의 마음은 이 후보 쪽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같다. 사실상 앞으로도 협조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친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사실 박 전 대표 진영엔 ‘이 후보 쪽이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로 다급하게 되니 뒤늦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라는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에 ‘좀 더 뼈아프게 우리의 빈자리를 인식하게 만든 다음 협조해야 한다’라는 말도 나온다.
박 전 대표는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는 정치인이지만 때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게끔 하는 ‘한방’이 있다는 것을 이명박 후보가 요즘에야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