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구상 의지도 밝혔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될 경우 인수위원회 없이 곧바로 청와대 들어가는 만큼 국무총리 지명 및 총리 제청에 따른 내각 구상안을 선보이겠다는 전략이다. 이른바 ‘준비된 대통령’ 이미지 전략을 본격적인 대선 구상의 선순위 로드맵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제는 ‘히든카드’다. 대세론을 굳힐 수 있는 디테일한 승부수만이 남았다. 핵심은 ‘임기단축 개헌’이다. 이미 임기단축 개헌은 문 전 대표를 전방위로 포위한 상태다. ‘호헌파’ 문 전 대표의 고민이 깊어진 이유다.
문재인 전 대표.
개헌은 비박(비박근혜) 발 분당 사태·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의 첫 번째 선택지와 함께 대권 구도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핵심 변수다. 비박계 투톱인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결별 선언으로 여권 원심력의 물꼬는 트였다. 반 총장은 12월 20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한국 특파원들과의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10년 동안 유엔 총장을 역임하면서 배우고 보고 느낀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살라서라도 노력할 용의가 있다”며 차기 대권 도전을 사실상 천명했다. 개헌 발 정계개편을 고리로 한 제3 지대의 확장성 여부만이 남은 셈이다.
개헌은 문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이다. 문 전 대표를 에워싼 개헌 구도 때문이다. 현재 개헌은 ‘다수의 개헌파 vs 소수의 호헌파’로 양분됐다. 한국 정치사에서 개헌은 일종의 ‘불쏘시개’ 카드였다. 87년 체제 전에는 ‘독재권력 연장’, 이후에는 정권획득을 위한 ‘판 흔들기’ 카드였다. 실제 민주화 이후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내각제를 연결고리 삼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권력 분점에 나섰지만, 집권 후 모두 약속을 파기했다. 개헌 카드가 ‘대세론’에 근접하지 못한 군소 후보들의 전유물에 그친 까닭이다.
현재 개헌파도 ▲후발 주자(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킹메이커 그룹(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등) ▲정계개편 그룹(새누리당 탈당파) 등으로 분화돼 있다. 명분은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 등 제7공화국 건설을 통한 체제 변경이지만, 속내는 현 구도의 균열이다. 그간 문 전 대표가 개헌 논의에 대해 “정략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한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현 정국은 박 대통령 탄핵 심판과 여권 발 분당, 베일에 싸인 ‘반기문 대안론’ 등의 혼재로 그 어느 때보다 가변적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개헌으로 불똥이 튈 경우 개헌에 따른 제3 지대 확장성이 확산할 수 있다. 만에 하나 헌법재판소(헌재)가 박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한다면, 수백만의 촛불민심은 개헌을 고리로 기성 정치권에 새판 짜기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새누리당 탈당파 역시 분권형 개헌(이원집정부제) 등을 전면에 내걸고 판을 흔들 수 있다.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 반 총장이 귀국 후 개헌파에 합류하는 시나리오도 살아있다. ‘호헌파’인 문 전 대표의 고립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지점이 이른바 ‘문재인의 개헌 딜레마’다. 문 전 대표 측 내부에선 개헌을 둘러싼 ‘백가쟁명 식’ 논쟁이 일고 있다. 아직 수면 위 공론화는 ‘금기사항’에 가깝다. 다만 물밑 기류는 다르다. 계파 상층부와 하층부의 온도 차는 확연하다. 문 전 대표를 비롯해 친문(친문재인)계 상층부는 일제히 개헌 논의를 일축하고 있다. 4년 전 대선에서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 등을 제시한 만큼 개헌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시기의 부적절성을 이유로 개헌 논의에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물밑에선 다양한 개헌 로드맵이 분출하고 있다. 특히 캠프 내부에서는 개헌 이슈만큼은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몇 차례 제기됐다. 그중 ‘임기단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차기 대통령 임기를 20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시점(2020년 5월 말)에 맞춰 2년 3개월 정도 단축하는 안이다.
차기 대통령 임기 단축 이외에도 박 대통령이 제안한 현직 대통령 임기 단축 개헌과 국회의원 임기 단축 등이 있지만, 전자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태다. 내각제나 분권형 개헌을 전제로 한 후자는 현 20대 국회의원 300명 중 다수가 반대할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 현실 가능성은 제로다. 임기 단축 개헌이 차기 대통령 권력구조와 맞물린 이유다.
친문계 한 관계자는 “문 전 대표가 개헌 이슈를 피하지 말고 적극 대응, 차기 정부의 개헌 로드맵을 제시하는 편이 낫다”며 “핵심은 지난 대선 때와 비슷한 개헌 논의 수준인지 그 이상을 뛰어넘는 개헌안을 제시할 것인지에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임기 단축 개헌안이 공식 루트로 윗선에 보고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다수의 관계자는 “개헌 논의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문 전 대표의 ‘임기 단축’ 개헌론 제시는 당 내부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민주당 중진 의원은 익명을 전제로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면, 문 전 대표가 임기단축 개헌 수용을 강하게 요구받을 것”이라며 “그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에 관련 입장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의원도 “문 전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개헌 견해를 밝히는 시기가 올 것”이라며 “대선 전 추진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차기 정부에서 ‘87년 체제의 종식’ 로드맵을 논의하는 것까지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 대권 주자들도 ‘임기 단축’ 개헌론을 꺼내 들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민주당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서 제7공화국 이슈가 ‘개헌파 vs 호헌파’ 구도를 넘어 ‘임기 단축 개헌 세력 vs 임기 단축 반대 세력’으로 디테일하게 들어갈 수도 있다. 임기단축 개헌은 ‘기득권 포기’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후발 주자들이 문 전 대표를 기득권 프레임을 덧씌우는 정치 도구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문 전 대표는 12월 21일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임기 단축 개헌론과 관련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것으로, 그런 얘기할 단계가 아니지 않으냐”라며 “개헌을 매개로 한 정계개편, 제3 지대, 이합집산 이런 얘기는 전부 정치적 계산속에서 이뤄지는 일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개헌=정략적 셈법’이란 기존의 입장을 굽히지 않은 셈이다. 김종인 전 대표는 이와 관련해 문 전 대표를 겨냥, “개헌하면 내가 대통령 선거하는 데 지장 있지 않나 생각하는데…”라고 비판했다. ‘임기단축 개헌 반대진영=기득권 세력’ 프레임은 살아있는 셈이다.
여의도 안팎에선 문 전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대세론이 흔들거나, 돌출 변수로 위기를 겪을 때 ‘개헌’ 승부수를 던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18대 대선 때도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파죽의 13연승을 기록하며 ‘대세론’을 굳혔던 문 전 대표는 이내 ‘친노 패권주의’ 벽에 부딪히자, 친노 2선 후퇴를 승부수로 던졌다.
2012년 10월 21일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전해철 기획본부 부본부장, 양정철 메시지팀장 등 ‘3철’을 비롯해 정태호 전략기획실장, 소문상 정무행정팀장, 윤건영 일정기획팀장, 윤후덕 비서실 부실장, 박남춘 특보단 부단장, 김용익 공감2본부 부본부장 등 9명의 친노 인사가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2년 친노 2선 후퇴로 위기를 돌파했다면, 이번에는 임기단축 개헌을 마지막 히든카드로 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개헌을 둘러싼 정치 공학적 셈법이 아닌 87년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당위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
침묵 깬 김한길 ‘패권 대 비패권’ 갈라치기 노린다 야권의 대표적 전략가인 김한길 전 국민의당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마침내 침묵을 깼다. 지난 4·13 총선 불출마 이후 두문불출했던 김 전 위원장은 조기 대선과 개헌 등이 혼재한 탄핵 정국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잇달아 던졌다. 김 전 위원장의 메시지는 크게 ▲정당 내 패권주의 타파 ▲사당화 청산 ▲개헌 등으로 압축된다. 이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비 패권지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제3 지대’ 등 중간지대 플랫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친문(친문재인)계 좌장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직접 정조준하는 한편, 당내 사당화 논란을 일으켰던 안철수 전 상임 공동대표도 겨냥했다는 점에서 대선판을 흔드는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분석된다. 실제 김 전 위원장은 12월 20일 MBC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문 전 대표를 향해 “청와대 권력의 사유화를 규탄하고 징벌했으면, 정당 권력의 사유화 문제, 정당의 사당화 문제를 먼저 돌아보는 게 당연한 순서”라고 말했다. 그는 “정계개편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면서도 ‘대선 전 개헌이 가능만 하다면 최선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네”라고 말했다. 앞서 김 전 위원장이 12월 18일 페이스북을 통해 침묵을 깬 지 이틀 만이다. 그는 당시에도 “국가 대청소를 말하려면 패권주의 정치, 패거리 사조직 정치부터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재개의 첫 물꼬로 패권주의 청산을 들고 나온 것이다. 명분은 ‘정권교체’다. 정치권 안팎에선 김 전 위원장이 대선 ‘양자 구도’를 위한 정계개편을 시도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와 민주당 친문(친문재인)계를 패권 프레임에 가두고 ‘비 패권지대의 단일대오’를 꾀한다는 시나리오다. 복귀 시점은 국민의당 차기 전당대회 직후(내년 1월 15일)가 유력하다. 4·13 총선 과정에서 안철수 전 상임 공동대표와 갈등을 빚다가 사퇴하면서 당내 조직 구축이 안 된 만큼, 당내 세력재편의 분수령인 당 대표 경선 뒤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파괴력은 미지수다. 세력도 조직의 구심점도 예전 같지 않다. 국민의당 한 관계자는 “(1997년과 2002년 대선 당시) 야권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역할을 한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겠느냐”라고 한 반면, 더불어민주당 당직자는 “무슨 힘이 있겠느냐”라고 반박했다. 김 전 위원장은 “현실정치의 장에 제가 서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꼭 필요한 날이 있을 때면, 누군가 제 의견을 구한다면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최근 김 전 위원장은 서울 동부이촌동 ‘옥탑방’을 방문한 여야 정치인과 두루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출범에 일조한 책사인 김 전 위원장도 정치적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