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당 대표 선출을 위한 2·8 전당대회 때도 당시 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전대를 엿새 앞두고 일반 당원과 국민 여론조사 반영 방식을 전격 수정, 문재인 전 대표의 경쟁자였던 박지원 후보(현 국민의당 의원)가 거취 고민까지 내비쳤다. 이번 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개헌저지 문건 역시 룰 논란의 연장선상이다.
문재인 전 대표. 일요신문 DB
민주당의 룰 딜레마 이면에는 계파 패권주의 논란이 깔렸다. 이른바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다. 이는 지난해 4·13 총선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의 호남 고립작전 활용에 빌미를 줬다. 민주당이 87년 체제 이후 야권의 핵심 두 축인 ‘호남 vs 친노(친노무현)·운동권’ 대립에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제1당의 ‘이래문’(이래도 문재인 저래도 문재인)과 ‘친문 사당화’ 논란도 이 지점과 궤를 같이한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번 민주당 경선 룰이 노풍(노무현 바람)이 강타했던 ‘2002년 경선의 재연’이냐, 상처뿐인 영광에 그쳤던 ‘2012년 대선 경선이냐’를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핵심은 경선의 역동성을 통한 시너지 효과, 즉 외연확장 가능성이다. 2002년 경선 땐 노무현 대통령이 ‘이인제 대세론’을 꺾은 기세를 몰아 본선에서도 ‘이회창 대세론’을 격파했다. 하지만 2012년 경선 땐 문 전 대표의 13연승에도 불구하고 본선에서 ‘박근혜 대세론’에 밀렸다.
초반 분위기는 적과 동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모양새다. 갈등의 진원지는 ‘모바일 투표’다. 당 지도부는 모바일 투표에 대한 거부감을 우려, 공식 명칭을 ‘ARS 투표’로 변경했다. 1월 10일 스타트한 당의 당헌당규강령정책위원회(위원장 양승조)는 2012년 대선 경선 룰을 기반으로, 추가적인 의제를 논의한다는 입장이다.
5년 전 대선 경선 모바일 선거인단은 108만 5004명이었다. 당의 뿌리를 둔 대의원·권리당원 20만 3000여 명을 제외하면, 순수 일반 국민은 88만 명가량 참여했다. 애초 지도부가 기대한 200만 명의 절반가량에 그쳤다. 당시 이외에도 ▲당원 가입 여부와 무관한 1인 1표제의 완전국민경선 ▲13개 권역별 순회경선 ▲과반 기준의 결선투표제 ▲본선 후보를 5명으로 압축하는 컷오프(예비경선) 등이 룰의 기본 골격을 이뤘다.
민주통합당 ‘이해찬 체제’의 예상은 빗나갔다. 비문(비문재인) 후보였던 손학규·정세균·김두관 후보가 첫 경선지역인 제주 순회투표(8월25일)에서 모바일 투표 방식의 불공정성을 전면에 내걸고 두 번째 순회경선인 울산지역(8월26일) 경선을 보이콧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후보 순위 1∼3번을 듣지 않고 찍으면 무효표로 처리된 데 대한 반발(문 전 대표 4번)이었지만, 속내는 문 전 대표에 대한 모바일 투표의 급속한 쏠림이었다.
경선 초반 지역인 제주·울산·강원(8월28일) 지역에서 문 전 대표가 얻은 대의원 득표율은 ‘14%·51%·18%’로 롤러코스터를 탔지만, 모바일 득표율은 ‘60%·52%·47%’였다. 제주 경선의 경우 지역 유권자의 8%인 3만 6000여 명이 경선에 참여, 이 중 90% 이상이 모바일을 통해 투표권을 행사했다. 비문계 한 의원은 모바일 투표와 관련해 “완전히 동원 선거다. 과거 박스 떼기만 아니지, 새로운 형태의 조직 동원 선거”라고 잘라 말했다.
현재 상황도 비슷하다. 보이콧의 그림자가 민주당을 덮쳤다. 연일 ‘친문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측이 경선 룰 구성을 위한 1·2차 회의에 불참했다. 박 시장 측은 서울 정무 부시장을 지냈던 임종석 전 의원을 데려간 것도 모자라, 내부에선 특정인 A와 B를 거론하며 차기 서울시장과 전북도지사 후보로 내정한 정황이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일종의 권력 나눠먹기를 통한 ‘사람 빼가기’를 공공연히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시장은 문 전 대표가 재벌개혁을 발표한 1월 10일 국회 정론관을 찾아 “참여정부 시즌 2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1월 12일엔 “촛불광장에서 야권 공동경선을 하자”고 주장했다. 추미애 대표가 밝힌 ‘공정한 경선’ 약속은 간데없고 패권주의만 나부끼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1월26일 이전 예비후보 등록→이후 컷오프(7일간)→선거인단 모집(2∼3주간)→당내 경선(2∼3주간)’ 등의 절차를 거쳐 3월 중순께 후보를 확정하는 일정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문 전 대표 측은 공개적인 대응을 자제하면서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캠프 한 관계자는 “당 밖에 ‘반기문 대망론’이 있는 상황에서 내부 싸움의 덫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문 전 대표 측은 경선 룰을 당에 백지 위임한 상태다. 문 전 대표 대변인격인 김경수 의원은 이와 관련해 “당에서 정하는 룰을 받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김부겸 의원은 2012년 경선 룰을 준용하되, 모바일투표보다는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선호한다. 다만 문 전 대표 내부에선 ‘권리당원 가중치’, 안 지사 측은 ‘다수의 토론회’, 이 시장 측은 숙의배심원제 등을 각각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조기 대선 일정이란 특수성 탓에 이번 경선 역시 2012년 대선 경선 룰에서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당헌당규강령정책위원회 핵심 관계자는 모바일 투표 도입 여부와 관련해서 “경선 룰에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모바일 투표가 한 축이 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이외에도 2012년 13개 지역에서 한 순회경선을 큰 단위의 권역으로 묶는 방안과 결선투표제 도입 등에도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원샷 통합 경선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넘어야 할 산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민주당 당헌·당규에는 당내 대선 경선의 결선투표제 규정이 없다. 사실상 당의 헌법이 흠결 상황에 처한 셈이다. 그러면서 “2012년 민주통합당 당시에도 결선투표제가 당헌·당규에 없어서 후보들 간 정치적 합의를 했다”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결선투표제로 정치적 합의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간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내부적으로 정한 4단계 경선 ‘컷오프→본 경선→결선투표→야권 통합 및 단일화’가 순항할지 미지수인 셈이다. 비문 측 관계자는 “모바일 투표 중심의 경선은 문 전 대표의 원사이드 게임이 아니겠냐”며 “역동성이 없으면 본선 경쟁력은 담보할 수 없다. 경선 흥행에 실패할 경우 계파 패권주의 논란으로 주류 역시 분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문 전 대표 캠프 내부에서는 비문연대보다는 범 친노계의 분화, 즉 ‘노무현 적자’ 논쟁에 대한 부담이 크다. 최근 원조 친노인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을 비롯해 황이수 전 행사기획비서관, 정윤재 전 의전비서관 등이 안희정 캠프에 합류하면서 양측의 신경전은 한층 증폭됐다. 안 지사를 돕고 있는 김종민 의원과 친문계 핵심인 전해철 의원이 윤 전 대변인의 거취를 놓고 고성이 오가며 설전을 벌였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내부 여진은 현재진행형이다.
문 전 대표와 안 지사 측의 뿌리인 ‘부산팀’과 ‘금강팀’의 갈등이 계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 지사는 2002년 대선 당시 염동연 전 의원과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이광재 전 강원지사 등과 함께 금강팀에 속했다. 반면 문 전 대표는 1980년대 부산 지역에서 노 전 대통령과 인권변호사를 같이 한 동지들의 조직인 ‘부산팀’ 좌장이었다.
이 밖에도 다크호스 ‘이재명 바람’은 건재하다. ‘이재명·박원순·김부겸’으로 이어지는 비문연대가 한층 공고해질 경우 합종연횡에 따른 판세 변동도 예상된다. 현재 비문계 핵심 의원이 후방에서 이들의 단일화 및 합종연횡을 위한 판 그리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조만간 비문연대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며 “당 내부에도 2∼3월 경선 빅뱅이 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