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수위의 ‘의욕과잉’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요한 정책들을 설익은 상태로 공표하는가 하면 발표한 정책을 하루에도 몇 번씩 번복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13일 당선인에게 국정과제를 보고하는 이경숙 위원장. 사진공동취재단 | ||
그러나 ‘호평’이 있으면 ‘악평’도 있는 법. 인수위의 의욕과잉이나 혼선을 불러일으키는 설익은 정책 발표들로 실망도 크다. 앞서 조사에서도 24.1%가 불만이었다. 지금 인수위의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많다. 국가의 장래를 좌우할 중요한 정책들이 설익은 상태에서 아무런 여과 없이 외부에 공표되는가 하면 인수위가 발표한 정책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번복되는 일도 나오고 있다. 인수위 내 소수만 알고 있는 내용들이 몇 시간 만에 언론에 유출돼 이명박 당선인이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혀를 차기도 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인수위의 행보를 중간결산해 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다 보니 과욕을 부리고 있다”는 논란이 처음 일었던 것은 휴대전화비와 유류세 인하를 발표하면서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지난 12월 30일 “유류세 10% 인하와 휴대전화비 인하를 가급적 빨리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전날 있었던 워크숍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동통신사들은 즉각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SK텔레콤은 “지난 10월부터 각 업체들이 이미 요금 인하를 추진 중이었는데 이런 내용이 반영된 상황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KTF, LG텔레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인수위의 휴대전화 요금 인하는 이 당선인의 시장자율경제 논리에 완전 위배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통부 관계자나 통신업계 관계자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대책 없는 정책안 발표에 업계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반발이 거세지자 이 당선인의 최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부처업무보고를 받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인수위 업무에 나설 것”이라고 이런 논란을 잠재웠다.
그런데 지난 17일 인수위는 갑작스럽게 “휴대전화 요금을 발신자와 수신자가 반반씩 부담하는 ‘쌍방향 통신요금제도’를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당선인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신요금 인하 못지않게 불필요한 통신 과소비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언명한 데 대한 후속조치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이 쌍방향요금제도 업체는 물론 사용자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사고 있다.
유류세 인하 방침도 마찬가지다. 인수위는 지난 12월 30일 휴대폰 요금 인하 방침을 밝히면서 “유류세를 10% 낮추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청와대가 “고유가 문제에 대해서 유류세 인하로 대책을 세우는 국가는 일부 중동국가밖에 없다”며 유류세를 인하할 수 없다고 밝혀온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도 이 당선인이 “유류세를 내리면 대형차를 타는 사람에게만 혜택이 가는 게 아니냐”는 한마디에 방향 선회가 불가피해 보인다. 인수위는 “유류세 10% 인하는 약속한 사항이니 지켜내고 말겠다”는 입장이지만 어떤 방법을 도입해야 이 당선인의 의중에 맞출 수 있을지 여전히 명쾌한 해답을 못 찾고 있는 상황이다.
이동관 대변인은 17일 오후 정례브리핑을 통해 “불법폭력이나 집단행동에 대한 엄정한 대응 및 공무집행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유관기관 합동으로 산업평화정착 태스크포스를 구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인수위 실무진에서는 검찰과 경찰, 노동부 등이 참여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TF 구성 방침은 몇 시간 만에 뒤집어졌다. 대선에서 이 당선인을 지지했던 한국노총이 긴급성명을 통해 “공안정국 조성 기도”라며 즉각 반발했기 때문이다.
인수위는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 대북정책의 기본틀과 방향을 계속 유지할 방침”이라고 명기된 ‘쉽게 이해하는 새로운 정부조직 Q&A’라는 자료를 배포했다가 뒤늦게 “실무자의 착오로 구버전 자료가 배포된 것”이라고 이를 부인하는 소동도 벌였다.
▲ 14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물을 마시는 이명박 당선인. 사진공동취재단 | ||
인수위는 지난 4일 730만 신용불량자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장수만 경제1분과 전문위원은 “신불자 대상자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금리가 부담되지만 잘 상환하는 사람도 있고 심한 사람은 원리금을 상환 못하는 사람도 있다”며 “신고를 받아가며 정도껏 조치를 적절히 취해나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원금 역시 상환해 주는 정책안을 만들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강만수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는 다음날 “모럴해저드 우려가 있어 원칙적으로 원금을 탕감하는 방안은 생각한 바가 없다”며 전날의 발언을 뒤집었다.
한편 자문위원들의 개인적인 발언이 인수위 전체 의견으로 받아들여져 혼선을 자초한 경우도 있었다. 자문위원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가 이 당선인의 취임식에 북한 인사를 초청해야한다는 발언을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남 교수는 지난 1일 “1월 중 북한에 특사를 보내 2월 대통령 취임식에 북측 고위급 인사가 참여토록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인수위에서는 이명박 당선인의 취임식에 북한 고위급 인사 초청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수위 측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개인적 의견을 마치 인수위의 의견인 것처럼 발언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이를 경고했다.
심지어 얼마 전 한 위원은 ‘언론사 성향 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위원들의 ‘과욕’도 큰 문제로 제기됐다. 인수위 사회교육문화 분과위 박광무 전문위원은 지난 2일 문화부 실무자에게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박 위원은 문화관광부에서 파견된 실무위원이었다. 인수위는 즉각 박 위원을 위원직에서 파면시키고 이 당선인까지 “차기 정부에서는 말도 안 되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성향 조사’의 여파는 여전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지난 15일 인수위의 정치사찰을 규탄한다며 이경숙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인수위의 검토 내용이 너무 쉽게 언론에 흘러나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조직개편 사안 중 하나는 이 당선인에게 보고된 지 불과 20여 분 만에 방송을 탔다. 이경숙 위원장은 한 언론사 기자가 조직개편안에 대해 묻자 “나보다 그쪽이 더 잘 아는 것 같다”며 황당해 했다고 한다. 이 당선인까지 나서서 인수위원들에게 직접 ‘함구령’을 내렸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설익은 정책안들이 계속해서 언론에 노출된 것이다. 이 당선인은 인수위원들에게 ‘개인정보 확인 동의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인수위원들의 휴대전화 사용 기록을 조회해 어떤 인물들과 통화를 했는지까지 조사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온 방안인 것이다.
한나라당에서도 인수위와 관련된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강재섭 대표는 지난 9일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인수위가 집행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집행기구처럼 보이는 부분에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그냥 하겠다고 정해놓고 밀어붙이면 안 된다”며 인수위가 지나치게 속도를 내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