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 가결 선포 장면. 이 사건은 이후 4·15 총선을 좌우한 결정적 변수가 됐다. | ||
1996년 15대 총선에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과반의 승리를 거뒀다. 당시 신한국당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당선자를 냈지만 특히 야당이 우세를 보였던 서울과 수도권에서도 여당이 승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북풍’이라는 막판 변수였다. ‘한국유권자운동연합’과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선거 후 실시했던 당시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15대 총선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북한의 정전협정파기 선언’과 ‘비무장지대 병력투입’을 꼽았다.
당시 정당들 역시 비슷한 분석을 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는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 등 막판에 몰아닥친 ‘북풍’에 휘말렸다”고 선거 결과를 자평했다. 계획했던 70석보다 훨씬 못 미치는 50석을 차지했던 김종필 전 총재의 자민련 역시 선거 결과에 대해 “북한의 휴전협정 파기와 판문점 무력시위가 보수·안정 세력을 여당으로 몰리게 해 강원과 경북의 자민련 바람을 잠재웠다”고 평했다.
15대 총선에서는 전국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거셌다. 당시는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가 나면서 드러난 권력형 금융 부정 비리에 수십 명의 정치인들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씨까지 연루된 일명 ‘한보사태’가 불거졌던 시기다. 당시 탄생한 정치신인의 수만 140명이었다. 당시 서울 종로구에서 전국구 초선 의원이었던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가 국민회의 4선 의원인 이종찬 의원에게 이긴 것도 이러한 ‘세대교체’의 바람이 거셌던 것이 한몫을 했다. 현재 한나라당의 홍준표 맹형규 의원 등도 이 덕을 톡톡히 봤던 사례로 꼽힌다.
한편 15대 총선에서는 최초로 MBC, KBS, SBS 방송 3사가 출구조사를 발표했다. 당시 방송 3사는 합동으로 투표자 전화조사를 실시해 정당별 예상의석수, 당선예상자 등을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와 얼마간 차이를 보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0년 16대 총선의 가장 큰 이슈는 공천반대운동과 낙선운동이었다. 16대 총선에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자의 병역이행여부, 재산, 전과, 학력 등을 공개하도록 선거법이 개정됐다. 이 자료를 토대로 981개 시민운동단체들로 구성된 ‘총선시민연대’가 공개적으로 후보들의 낙천·낙선 운동을 벌였다. 대상자는 탈세혐의나 사기 등 파렴치 전과가 있는 후보가 주 대상이었다.
이런 총선시민연대의 정치실험은 공천에서부터 영향력을 발휘해 낙천운동 대상자 중 3선 이상의 정치인들 27명이 불출마 선언을 하거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총선시민연대는 16대 총선 직후 “낙선대상자 86명 중 59명, 집중 낙선 대상 22명 중 15명이 낙선했다”고 자체집계 결과를 발표했다. 지역구에 출마한 현역의원 207명 중 41.5%가 낙선운동으로 낙마한 셈이다. 낙선 대상자로 지목돼 16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셨던 인물은 민주당 이종찬 손세일 서정화 이강희 이성호 후보와 한나라당 김중위 이사철 후보 등이다.
그러나 낙선 운동은 16대 총선이 57.2%라는 역대 최악의 투표율로 기록된 원인으로도 꼽힌다. 선관위는 “후보자의 병역, 전과, 납세 내역이 공개되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이 후보자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시킨 것이 투표율 저하의 원인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학자들 역시 “젊은 층의 정치참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절반 이하의 투표율을 보인 것은 단순히 몇 명을 낙선시켰다는 성과보다 더 신중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낙선운동’은 ‘동서분열’을 오히려 공고히 했다는 문제점도 나타냈다. 영남권의 정형근 김호일 하순봉 후보, 호남권의 민주당 김태식 후보 등은 낙선대상자로 선정됐음에도 오히려 압승을 거뒀다. 한나라당은 영남권 65석 중 울산에서 정몽준 후보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것을 제외하고 64석이라는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은 호남에서 29석 중 25석을 차지했는데 나머지 4명의 후보는 민주당 입당이 예고된 무소속 후보들이었다. 후보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이 높아지면서 “차라리 지역민을 뽑아주자”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2004년 17대 총선의 최대 변수로 작용한 것은 ‘탄핵 역풍’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열린우리당에 완패했다. 당시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에서 총선 낙선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낙선자 350명 중 76명(21.7%)이 자신의 낙마 이유를 ‘탄핵 역풍’이라고 말해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총선이 있기 직전 정동영 전 의장이 “60·70대 분들은 투표 안하고 집에서 푹 쉬셔도 됩니다”라는 ‘노인폄하’ 발언으로 일명 ‘노풍’을 맞았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수도권 등지에까지 ‘박풍’을 일으키며 선전하는 모양새였지만 탄핵역풍을 꺾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탄핵 정국은 ‘물갈이’ 바람도 동반했다. 한나라당은 공천에서 현역의원 149명 중 60여 명이 탈락했고 40대를 중심으로 한 초선 의원이 188명에 달했다. 반면 탄핵을 주도했던 당시 민주당 조순형 의원, 홍사덕 전 한나라당 원내총무, 유용태 민주당 의원 등은 줄줄이 낙마했다.
1인 2표제가 최초로 도입된 것 역시 17대 총선의 큰 변수였다. 특히 1인 2표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민주노동당. 민노당은 지역구에서는 경남 창원 을에 출마했던 권영길 의원, 울산 북에 출마했던 조승수 의원 단 2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15%의 정당 득표율로 8명의 비례대표 당선자를 배출해 원내 3당으로 급부상했다. 1인 2표제는 또한 지역주의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해냈다는 평도 받았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