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선언을 한 뒤 차량을 타고 떠나고 있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불출마 선언 당일에도 반 전 총장은 인명진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정병국 바른정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만나며 대선 일정을 소화했다. 이들과 비공개 면담을 할 때도 반 전 총장은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은 이들과 만난 후 불과 30분 뒤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에서 반 전 총장은 “정치권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다.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 뉴스로 개인과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을 봉직했던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만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참모들조차 반 전 총장의 깜짝 선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 전 총장은 자신의 불출마 결심을 가족과 캠프를 총괄했던 김숙 전 유엔 대사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주요 참모들조차 반 전 총장의 불출마 사실을 TV를 보고 알았다. 실제로 일부 참모들은 이날 아침까지도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반기문 중도 하차설’에 대해 일축했었다. 반 전 총장 측은 여의도 대하빌딩에 캠프 사무실 계약을 마치고 이미 공사까지 진행 중이었다.
반 전 총장은 기자회견 후 마포 캠프로 이동해 직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미리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말을 했다면 나를 말렸을 테니까 그러지 못했다”며 거듭 사과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일부 직원들은 눈물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불출마 선언 이후 반기문 캠프 관계자들은 대부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포 캠프에서는 기자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몇몇 캠프 관계자는 전화를 받았다가도 “지금은 통화가 어렵다. 지금 상황 아시지 않느냐”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어렵게 통화가 연결된 한 캠프 관계자는 “불출마 사실을 전혀 몰랐다. 불출마 당일까지도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고 정상적으로 일정을 소화하지 않았나. 너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반 전 총장이 특정 정당에 입당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창당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내부적으로 건의가 수차례 있었는데 창당 작업이 지지부진해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니 반 전 총장이 그때부터 이번 대선에 ‘올인’하는 것을 망설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한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 다음 날 기자들과 만나 “(대선 출마에 대해) 작년 12월 하순부터는 여러 가지로 고뇌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귀국하기 전부터 대선 출마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예정대로라면 귀국 후 새누리당에 입당해 아주 편하게 대선 레이스를 치렀을 텐데 최순실 사태로 새누리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곤혹스러웠을 것”이라며 “반 전 총장이 ‘지금 당이 없어 손으로 땅을 긁는 심정’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일 하락한 지지율도 반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한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 전 총장은 지난 2월 2일 사실상 해단식을 가지면서 “한 번 도전해보겠다. 몸을 던지겠다고 한건데 사실은 제가 보니까 좀 어렵다는 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반 전 총장 캠프 관계자도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반 전 총장이 심리적으로 약간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다. 참모들이 지지율은 떨어졌다가도 오르는 것이니 힘을 내시라고 말했었다”고 했다.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이 탈당 후 반 전 총장을 지지하기로 했었는데 반 전 총장 지지율이 하락하자 탈당을 보류하면서 반 전 총장이 이에 대해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는 증언도 나왔다. 반 전 총장이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정치권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했다’는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를 당했다’는 구절과 관련해서는 최근 반 전 총장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관련된 의혹까지 터져 나오자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반 전 총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생과 조카 문제는 (내가 직접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도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 아닌가. 그런데 (언론이) 계속 확대 재생산하는 의도가 뭐냐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평소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다’는 말을 자주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 전 총장 캠프 합류를 앞두고 있던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반 전 총장 불출마 선언 다음날 “원래는 반기문 캠프 선대본부장으로 가는 것이 결정돼 있었다”면서 아쉬움을 나타냈다. 캠프 실무진 가운데 일부는 ‘생업까지 접고 도우러 왔는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느냐’며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의 영입을 위해 노력해왔던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은 반 전 총장에게 사과 전화를 받고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지지단체들 중 일부는 반 전 총장에게 불출마 선언을 철회해달라고 강하게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지단체 회장은 “불출마 선언을 철회 해달라는 성명서를 내려고 내부 논의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미 반 전 총장이 결심을 굳힌 것 같아 포기했다. 평소 연락하던 캠프 관계자들과 연결이 안 돼 답답하다”면서 “마포 캠프 내부에서 갈등이 있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긴 했지만 불출마 징후는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불출마 선언 직전까지도 캠프에서 일정이 있으면 와서 응원해달라는 등의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지지단체 회장은 “불출마 선언 소식을 듣고 바로 반 전 총장 사진을 내리고 단체 이름까지 바꿨다. 향후 다른 대선 주자를 지지하자고 회원들끼리 의견을 모으는 중”이라며 “일주일 후에 우리 단체 임원진들이 정식 초청을 받아 캠프를 방문하기로 했었다. 불출마 선언과 관련해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co.kr
반기문 <일요신문>에 화 내더니…‘중도하차론’ 예상이 현실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주변 참모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주변 참모들은 반 전 총장의 중도하차론이 제기될 때마다 ‘흔들기 하지 말라’며 강한 불쾌감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 귀국 후 연일 악재가 터져 나오자 정치권에선 그가 대권 레이스를 완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과거 대선에서도 초반 높은 지지율을 보이다 사라진 제3지대 후보들과 비교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참모들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일축했었다. 반 전 총장 본인도 완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1월 24일 “그 말(중도 포기)은 제가 한 적이 한번도 없고 다른 분들이 그렇게 희망하는 것 같다. 제가 어려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희망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저는 일단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심사숙고 고뇌해서 결심한 것이다”라고 했었다. 앞서 <일요신문>은 반 전 총장 중도하차 가능성을 다룬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지령 1290호 제목 ‘그에게서 고건의 향기가’). 이를 두고도 반 전 총장을 비롯해 캠프 내부에서 성토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한 캠프 핵심 관계자는 “반 전 총장이 직접 일요신문 기사를 언급하며 불쾌해했다. 그래서 일부 캠프 관계자들이 신문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을 흠집내기 위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2월 1일 대선에서 중도하차했다.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