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4일 손학규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번 총선에 출마할 뜻을 밝힌 박지원 전 장관의 모습도 뒤에 보인다. 국회사진기자단 | ||
‘DJ손학규 밀월설’이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다. 밀월설은 손 대표가 정치생명을 담보로 한나라당을 탈당해 범여권 경선에 뛰어든 배경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란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지지기반이 전무한 손 대표가 호남권 정치세력이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범여권 경선에 아무런 대책 없이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관측됐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분명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했을 것이고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DJ가 막후에서 역할을 했을 것이란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대선 본선은 물론 범여권 경선에 깊이 관여해 온 DJ가 고육지책으로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던 정동영 전 장관의 대항마로 손 대표를 끌어들인 게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했던 것. 정치권 주변에선 이때부터 두 사람 간의 대권 연대론 내지는 밀약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손 대표는 한나라당 탈당 및 범여권 경선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DJ 측근들을 비밀리에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동교동계 막내격인 설훈 전 의원은 손 대표 경선 캠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범여권 최대 주주로서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정 전 장관이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사람의 대권 밀약설은 실체 없는 해프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밀약설이 재등장하게 된 배경은 ‘호남후보 필패론’을 극복하고 신당 대선주자로 나선 정 전 장관도 ‘노무현 정권 심판’ 성격이 짙었던 본선에서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득표율 차이로 완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사상 유례가 없었던 처참한 대선 성적표를 받아든 범여권은 그야말로 고사위기에 직면했다. 10년만에 보수세력에 정권을 넘겨준 아픔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분위기라면 4월 총선도 낙관할 수 없다는 위기감만 증폭됐다. 결국 손 대표는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침몰 위기에 처한 신당 선장으로 등극했고 DJ는 이러한 손 대표의 든든한 지원군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권 밀약설에 이어 두 사람의 총선 밀월설이 재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밀월관계는 지난달 24일 회동을 통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DJ는 이날 손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손 대표는 이 세력의 대표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람이 아니냐. 민주적 절차에 의해 ‘50년 정통 야당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가져라”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어 “야당의 존립가치를 보여줘야 한다” “양당체제를 복원시켜야 한다” 등 대안 야당론과 맞물린 손 대표의 역할론을 주문하기도 했다. 신당 대표에 이어 통합민주당 대표로 등극했음에도 끊임없는 정체성 논란과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손 대표에게 한껏 힘을 실어준 발언으로 해석된다.
DJ는 또 전날(23일) 손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가능성을 놓고 청와대와 설전을 벌인 것과 관련해 “손 대표는 한나라당 시절에도 햇볕정책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찬성했다”며 손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대선 때 신당 후보로 나선 정동영 전 장관이 완패한 당한 것과 관련해서는 “1955년 민주당을 창당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같이 크게 진 적은 없다. 나도 충격을 많이 받았다. 이번에는 너무 많이 졌다”고 말해 범여권 일각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정동영 책임론’을 우회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탈 노무현’ 노선과 ‘탈이념 생활밀착 정치’라는 새로운 진보 노선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 손 대표에게는 큰 힘을 실어준 반면 차세대 호남맹주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정 전 장관에게는 “좀 더 자중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손 대표도 DJ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놓고 치열한 샅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신당 측이 ‘통일부 존치’를 최우선 순위로 상정한 배경에는 손 대표의 ‘DJ 끌어안기’ 복심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통일부를 안 없애면 나라가 망하느냐”며 통일부 폐지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DJ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손 대표가 핵심 측근들을 앞세워 동교동계와 접촉을 강화하면서 총선 공천 문제 등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해 물밑 교감을 나누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동교동계 핵심이자 DJ 복심으로 통하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1일 신당 입당과 함께 목포 출마를 시사한 것도 이러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박 전 실장은 이날 입당 기자회견을 갖고 “50년 전통의 민주평화개혁세력의 집합체인 신당 창당에 어느 정도 기여했고 신당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제 세력을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손 대표가 주창하고 있는 ‘강력한 야당론’과 일정부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중진인 L 의원은 13일 기자와 만나 “박 전 실장의 출마는 DJ의 의중이 반영됐을 것”이라며 “DJ가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만큼 손 대표와 공천 문제 등 사전 조율이 있었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L 의원은 또 “대안 야당 맹주 자리를 확보해 차기를 노리고 있는 손 대표 입장에서는 정동영 전 장관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호남의 절대 지주인 DJ의 힘이 절실하고 자신의 치적을 승계하고 정치적 보호막을 위해 박 전 실장 등 핵심 측근들의 국회 입성이 불가피한 DJ는 손 대표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두 사람은 4월 총선에서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로 상호 윈윈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주변에서 손 대표가 당초 계획했던 혁명적 공천 쇄신을 단행하지 못할 것이란 섣부른 관측이 나돌고 있는 것도 L 의원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두 사람의 밀월설 실체 여부를 떠나 DJ가 손 대표를 ‘50년 전통 야당의 승계자’로 치켜세우며 애정공세를 펼치고 있는 배경에는 가신인 박 전 실장과 아들 김홍업 의원 등 핵심 측근들을 공천해 달라는 강한 의중이 담겨 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DJ가 복심을 드러낸 만큼 손 대표 또한 공천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DJ냐’ ‘마이웨이냐’를 놓고 또 한번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손 대표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거센 후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17일 통합 출범식을 갖고 19일부터 총선 후보자 모집에 들어가는 등 본격적인 공천 전쟁 모드로 진입하고 있다. 부정부패 연루자 배제 여부 등 공천기준 설정을 둘러싼 계파간 갈등이 심화될 조짐이 일고 있고 호남 물갈이론과 맞물린 공천 칼바람도 예고된 상태다.
특히 한나라당이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돼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인사들에 대해 공천신청 자격을 박탈키로 결정했기 때문에 불리한 총선 판세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한나라당 이상의 쇄신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손 대표와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 등은 “쇄신대상에서 예외는 없다”며 원칙론을 천명하고 있지만 의지대로 공천 칼날을 휘두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공천 신청을 준비 중인 당내 핵심 인사들 중에서도 부적격 시비가 일고 있고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된 호남권 현역 의원들의 집단 반발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선기획단장을 맡고 있는 신계륜 사무총장은 2006년 2월 대부업체 ‘굿머니’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전력이 있고 정대철 고문도 2002년 대선자금 불법모금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노 대통령의 386 핵심측근인 이광재 의원은 국세청 인사개입 의혹으로 검찰 내사를 받고 있고 안희정 씨 또한 부정부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던 김민석 전 의원은 2005년 6월 서울시장 선거 당시 손길승 SK 회장으로부터 2억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특히 박 전 실장과 DJ의 차남 김홍업 의원도 금품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된 전례가 있어 이들의 공천 여부는 ‘DJ-손학규 밀월설’과 맞물려 공천 전쟁의 최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 두 사람이 공천을 받게 될 경우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는 호남권 현역 의원들 가운데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의 거센 반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김원기(전북 정읍) 전 국회의장과 염동연(광주 서구 갑) 의원 등 호남권 중진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해 호남 물갈이론이 탄력을 받으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호남 의원들은 공천 과정을 지켜본 뒤 여차하면 집단 탈당 내지는 무소속 출마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호남권의 한 초선 의원은 “원칙 없는 호남 물갈이론에 반대한다”며 “박 전 실장이나 김홍업 의원 등 부패 연루자는 공천을 주면서 결격 사유가 없는 현역들을 잘라 낸다면 거센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