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기록유산 등재 키워드는 ‘책임감’
국채보상금연조성책 국채보상에 참여하면서 금연을 조건으로 의연금을 보조한 사람들의 명단과 성금액을 기록한 ‘국채보상금연연금보조성책’
[일요신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나라가 휘청거렸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케 한 것은 정부의 시책이나 대기업의 지원이 아닌 순수한 국민들의 힘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의 돌반지부터 백발 어르신의 손때 묻은 팔찌까지 수백만의 국민이 참여해 227t의 금을 모으는 기적을 일궜다. ‘내 조국의 위기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이 같은 대국민 책임감과 희생정신의 원동력은 110년 전 대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일요신문>이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10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를 만나 자세한 내막을 들어봤다.
#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이젠 세계로 알린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우리나라 열네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전망이다. 그간 국채보상운동은 3·15의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 대통령령에 근거해 정부가 제정·주관하는 국가기념일 등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돼왔다.
대구시와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대구로부터 시작된 ‘희생·책임’ 정신의 발로인 ‘국채보상운동’의 명성을 되찾고자 수년째 각종 심포지엄과 학술대회를 가졌다. 2015년 11월25일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국내 심사를 통과, 이제 7개월을 앞두고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는 ▲권영진 대구시장, 김관용 경북도지사, 서상기 의원을 주측으로 한 고문단 54명 ▲신동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등 공동위원장을 필두로 엄창옥 경북대 교수를 단장으로 한 실무추진단 등 추진위 73명 ▲전택수 위원장 등 자문단 39명으로 구성됐다.
신동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엄창옥 경북대 교수는 이 같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의미를 단순히 지역차원이 아닌 ‘한국 시민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초점을 뒀다. 3·1운동이 비폭력인 동시에 총에 맞으면서까지 항거하는 가장 강력한 저항운동인 것처럼 국채보상운동도 온 국민이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일본의 경제적 예속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그쳐선 안 된다. 다시금 신(新)국채보상운동이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대사회에 사라진 강력한 도덕감과 사회 공동체의 책임감 등 사회적 자산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는 과거 계몽주의적 성격과 항일투쟁의 성격을 규합한 사회연대라는 시너지효과를 재현할 발판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한편으로 세계적인 것이 꼭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국채보상운동을 프랑스에 제출하면서 추진위는 수많은 고민을 했다. 이러한 고민의 핵심키워드는 ‘책임감(responsibility)’으로 나타났다. 가장 가난한 서민이 조국을 위해 희생해 빚을 갚는 책임감이 20세기 한국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화가 권리(right)에 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책임감이라는 주장이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유네스코 등재의 발판이 마련되면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승화할 대구의 구심점을 만들 계획이다. 기존의 역사박물관을 넘어 시민들의 살아있는 삶을 기록·보존하고 이를 체험·학습하고 창작하는 박물관과 아카이브(archive, 기록보관) 그리고 도서관이 통합된 ‘라키비움(library+archive+museum)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처럼 대구의 오래된 도서관을 털어내고 도서관과 미술관, 창작관, 아트숍, 공연장을 결합한 역동적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재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엄 교수는 “광주는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면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했다. 청주시의 ‘직지장’ 역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고인쇄박물관에 개설된 것이다. 부산에서는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경북은 ‘음식디미방’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영양의 두들마을을 음식디미방 촌락으로 조성했다. 이 같은 지역정체성을 지역경쟁력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현 시점에서 절실하다“고 밝혔다.
신동학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국민의 희생적 가치를 일깨워주는 이 운동은 영원히 기억해야 하지만 전철을 밟지는 말아야 한다. 남녀노소 또는 빈부에 관계없이 전 국민이 채무자의 책임을 다하면서 평화적으로 동참해 채권자인 일본의 책임도 함께 물어 경종을 울린 저항정신은 대구를 넘어 세계의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나라 빚 내가 갚는다···대국민적 책임감(responsibility)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부녀자는 가락지를 팔아 민족의 경제자주권을 되찾자며 떨쳐 일어난 민간주도 운동이다. 양반 관료부터 일반 백성은 물론 기생, 노비, 거지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참여했다. 당시 1907년 일제의 침탈로 우리나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당시 돈으로 1300만원, 현재로 환산하면 3300억원 상당의 나랏빚이 생겼다.
이때 각계각층에서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는 패물을 기부해 나라를 구하자는 운동이 대구에서 일어났다. 1907년 2월21일 서상돈·김광제 선생 등이 주도한 애국계몽운동단체 대동광문회는 돈을 모으고자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열고 국가 경제자주권 회복에 나섰다. 이러한 경제주권 수호운동은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이어져 민족경제부흥이라는 주요 과제를 제시했다.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지속된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한 돈은 1907년 3월부터 1908년 7월까지 약 20만원 정도가 수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금액은 국채에 비하면 미비하다. 그러나 당시 의연한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상인과 농민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일제가 조사한 내용을 보면 각 신문사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등에서 모금한 돈은 대한매일신보사 3만6000여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4만2308원 50전, 황성신문사 8만2000여원, 제국신문사 8420원 6전, 만세보사 359원, 국민신보사 55원, 국채보상기성회 18700원 22전 5리로 총 18만8000원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금액은 정확한 금액은 아니다. 각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 20만원 정도로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수합된 국채보상금 중 대한매일신보에서 수합한 보상금 일부를 광산과외국 기업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대구국채보상운동 기념관에서 엄창옥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 단장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학생부터 기생까지···국내 최초 ‘학생·여성운동’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공립·사립·전문학교·중학교·소학교·여학교 등 모든 학교의 학생들과 선생님 심지어 사환까지 한 덩어리가 돼 의연금을 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생운동이라는 의미를 갖는 국채보상운동에서의 학생들의 활동은 이를 시작으로 해 식민지 기간 내내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4·19 등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학생들이 중심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주체로 활동한 최초의 여성운동으로 초기부터 여성들은 각종 단체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양반 부녀자는 물론, 상인, 신여성, 기생, 삯바느질 여성 등 모든 계층의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볼 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여성 참여는 여권신장의 계기로 이어졌으며 일제시대에 활발히 전개된 여성 독립운동의 기초가 됐다.
# 한국 최초 언론캠페인···담배까지 끊어버린 국민적 기부운동 확산
국채보상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언론 캠페인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부터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각종 언론매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언론은 보도와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했고 매일 의연금을 내는 사람들을 보도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반이 됐다.
사실 국채보상운동 이전에도 재해구휼 등 목적을 위한 기부행위는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역·계층적 한계가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국민적 기부운동이었다. 이러한 역할의 공로는 언론이 컸다. 국민적 기부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금의연 등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근간이 되기도 했다.
국민적 기부운동은 금연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 담배는 일본상인들의 폭리를 취하는 대표 상품이었으며 담배로 인한 경제적 폐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에 금연운동을 통해 일본 상인의 상권의 침탈을 견제하면서 그 비용으로 국채를 보상하려고 한 움직임이 있어졌다.
대구국채보상운동 기념관
# 일제의 방해로 중단 그리고 이어진 애국정신
1907년 2월에 시작돼 온 국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처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을 때 통감부는 한국인의 성격으로 보아 단연 운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가볍게 보고 넘겼다. 일본의 시사신보에서는 ‘한국민의 빈곤으로는 거액을 수집하기 어려울 것이기에 외국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국민적 운동으로 번져나가자 일제는 당황하고 만다. 일제는 어용단체인 일진회 등을 통해 방해공작을 펴는가 하면 애국 언론과 정치·사회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제정·공포했다.
보안법의 공포로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적 단체인 대한자강회가 강제해산, 신문지법에 의한 언론탄압이 이어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베델 등은 일제의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밀착해 운동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일제는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고자 3차에 걸친 공작을 폈으나 영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끝내 실패했다.
그러자 일제는 이른바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날조해 언론을 통한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꺾고 운동을 좌절시켜려 했다. 이를 통해 1908년 7월 대한매일신보사 총무이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회계책임을 맡고 있던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했으나 결국 무죄선고를 받게 된다. 양기탁은 비록 무죄를 받았지만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이 커져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꺾고 운동을 좌절시키려는 일제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 됐다. 한편으로는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조종해 국채보상운동을 반대하고 국채보상운동기성회의 해산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렇듯 집요한 일제의 탄압으로 자발적인 국민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침체됐다. 신분과 계급·성별·연령·종교·국적까지도 초월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온갖 책동으로 좌절됐으나, 이때 형성된 국민의 결집된 힘과 애국정신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920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할 수 있었던 민족의 저력이 됐다.
대구= 남경원 기자 skaruds@ilyodg.co.kr